2018년 9월 23일 일요일: 보고타, 콜롬비아



 어제 밤에 안 봤던 나르코스를 볼까, 스페인어 공부를 할까 여러 생각을 했지만, 정작 한 건 초저녁부터 풀잠. 일어나니 새벽이었다. 루시아와 이전에도 봤던 숙소 근처 공원에서 만나기로 하고, 여러 날 동안 봤던 정든 수위와 인사하고, 큰 배낭을 숙소에 맡겼다. 사실 따뜻한 물이 잘 안 나온 것 빼고는, 싼데도 넓고 부엌, 냉장고까지 있었던 가성비 좋고 뛰어난 숙소였다. 내가 털려서 가성비가 무색해진 게 문제지.


 이제는 정이 든, 숙소 근처의 공원인 '히피들의 공원(Parque de los Hippies)'에 가서 루시아를 만나기로 했다. 



 만나기로 한 시각은 아침 7시 30분


버스 시각은 9시이니 여유는 충만 그 자체.



보고타+레인보우


 왠지 이 앞에서 여러 포즈를 지으며 사진을 찍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의 조형물이지만, 사진을 찍어 줄 사람도 없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할 만한 담력도 없었다. 나중에 찍자 나중에.


훌리오 플로레스의 동상.


 정확히 '훌리오 플로레스 흉상 앞'에서 만나기로 해서, 저기서 기다렸다. 시인이라는데, 위키피디아에 찾아 봐도 영어 자료는 없고 스페인어 자료만 있다. 스페인어를 배워야 할 이유가 늘었네. 나중에 스페인어 더 배운 뒤에 위키피디아 독해해서 이 포스팅 업데이트해야지 ^_^;


차선의 한 쪽 절반을 자전거만을 위해 쓰고 있다.


 기다리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일요일 아침이라선지 차선의 절반을 자전거가 차지하고 있었다. 보고타에 오고 첫 이틀 정도는 너무 나쁜 공기 때문에 다니기가 힘들었는데, 일요일에 이렇게 자전거를 이용을 장려하는 것도 좋은 정책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는 자전거 이용자들을 위한 아침을 팔고 있었다. 바나나, 빵, 아레빠, 각종 과일 등등. 많이들 사 먹더라. 자전거를 참 좋아하셔서 전국토를 자전거 도로로 만드신 우리나라 전 대통령님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다 좋은데,


 루시아가 안 온다. 벌써 8시인데? 




 아무리 콜롬비아인들이 시간을 잘 안 지킨다고 해도, 7시 30분에 만나기로 약속했고 9시 버스인데 지금 쯤은 당연히 와 있어야 하지 않나. 


 설마 지금까지 모든 게 다 몰래카메라였던 건 아닐 거고. 새벽에 통화까지 했고, 차도 몰고 오는데 왜 30분이나 늦지 생각했는데...


계속해서 지나가는 자전거 행렬.




 끊임없이 지나가던 자전거 행렬을 보던 나는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서 튀는 것을 느꼈다.



루시아도 일요일에 자전거 때문에 도로 다 통제하는 거 몰랐던 거 아님...? 하는 생각이.





 생각해 보면 내 쪽 편 도로 다 막아놨는데 그 흉상 앞에서 보자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거 아니었을까. 아무리 현지인이라도 최근에 바뀐 거거나 일요일 아침에 밖에 잘 안 나가면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약간의 패닉과 함께 보고타에 결국 하루 더 있게 되는 것인가 하는 체념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연락이라도 해 봐야지 싶어서 와이파이라도 찾아 보는데, 약한 시그널이 자꾸 잡혔다 말았다 해서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와이파이를 잡으려고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흉상애서 어느 정도 멀어졌는데, 






 멀리서 "기섭!!" 하고 소리지르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루시아였다. 흑... 넘나 반가운 것.




탑승


 얘기를 해 보니 예상대로였다. 자기도 도로에 나오고서 무슨 막힌 도로가 이렇게 많은지 당황했다고. 일요일 아침에 차 끌고 나온 적이 없어서 거의 몰랐단다. 


자기가 사는 도시의 변덕스러운 교통체계에 놀란 루시아와 이제부터 low-profile을 실천하기로 한 범죄자 바이브의 나.



 구글 맵으로 터미널을 찍어 보니 예상 시간이 20분인가가 나와서 여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차를 몰고 가다 보니 정말 예상치 못한 도로가 막혀 있고 해서, 20분만에 갈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이 점점 줄어들었다.


보이십니까? 이 장대한 교통통제의 현장이?


 정말 자전거가 뭐라고 군데군데가 다 막혀 있었다. 지도에 저렇게 표시된 것들도 이용자들이 제보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막힌 도로는 훨씬 더 많았다. 구글 지도 내비게이션의 최단 경로만 믿고 가다가 유턴을 몇 번이나 했는지, 점점 시간은 촉박해졌다. 


말년갑이 이 도시를 묘사하는 걸 보고 싶다.


 가고자 했던 길이 막혀서 다른 좁은 길로 차 몇 대가 들어갔다가, 하나 하나 다 답답하게 유턴해서 나오는 꼴을 보니, 아니 자전거도 좋지만 왜 모든 사람들이 다 헤맬 정도로 이렇게 교통을 통제하나 싶었다. 다시 그 전 대통령님이 생각난 건 덤이다.


8시 46분.


 구글 지도에서 최단 거리로 소개한 주택가 경유하는 길로 들어갔다가 모든 샛길이 다 막혀 있어서 수 차례의 유턴과 방향전환 끝에 드디어 안정적인 궤도로 진입했다. 8시 46분.


간간이 막혀 있는 좁은 길들.


 저런 막힌 길들을 보면서, 와 절로 안 가길 잘했다 생각하며 구글이 알려주는 최단 경로를 따라 열심히 터미널로 달려가는데,






 버스 출발 시간 8분을 남기고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나야 면허는 있지만 사람 죽이기 싫어서 한국에서 한 번도 운전을 해 본 적이 없으니, 한국 도로는 어떤지 모르겠다만,

 보고타는 뭔가 도로 시스템이 마음에 안 드는 게, 한 뱡향으로 가는 도로가 헷갈리게 엄청 많다. 예컨대 우리가 잘못 든 곳에서는, 구글에서 '오른쪽으로 돌라'고 얘기했지만, 정작 오른쪽에는 ① 급하게 진입해서 유턴 비슷하게 해서 나가는 길, ② 45도 정도로 들어가는 길, ③ 거의 직진이지만 완만하게 오른쪽으로 꺾여 있는 길, 이렇게 세 길이 있었다. 우리야 구글에서 '우회전'하라고 하고, 뒤로 턴하는 건 아닌 것 같으니 2번 도로, 45도 정도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지만, 정답은 3번이었습니다 ^_^









 나는 여기서 진짜 포기했는데 루시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의지력이 나오는 걸까. 빨리 경로를 재설정해서 차를 빠르게 몰았고, 두 블럭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서 아까 길을 잘못 든 포인트를 버스 출발 시간 4분을 남기고 다시 지났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도로로. 






 그리고 출발 시간이 3분이 남자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아까 거기가 마지막 포인트였던 셈. 루시아가 출력해 준 버스 표를 들고 정말 미친듯이 뛰었다. '메데진 가는 9시 버스, 볼리바리아노!' 이 말을 몇 명에게 하며 길을 물었는데, 역시 경찰서에서 나를 여러 번 엿 먹였던 콜롬비아답게 사람마다 말이 다 다른 거임 엌ㅋㅋㅋㅋㅋ


 어디로 가랬다가 다시 돌아가랬다가, 진짜 터미널에서 똥개훈련하면서 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데 논산에서 체력측정했던 3km 달리기 이후로 제일 힘들었음ㅋㅋㅋ숨이 턱까지 차오른다는 게 관용구가 아니고 진짜 느낌을 묘사한 거란 걸 깨달은 거임ㅋㅋㅋㅋ


 8시 59분이 되었을 때에는 여기까지 왔는데 놓치면 정말 억울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다행히 마지막에 물어 본 군인이 확실하게 길을 알려 줬고, 그 쪽으로 아무리 가도 안 보여서 또 낚였나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 쪽 방향으 제일 마지막 게이트가 내가 타는 버스 회사 게이트라, 9시를 아주 조금 넘겨 탑승구에 도착.



 버스에 올라타 한숨 돌리자, 9시 3분 정도였나, 버스가 출발했다.














 뭐 버스에 탔다고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메데진까지의 여정은 자그마치 10시간.  

 난 처음에 10시간이라길래, '아 역시 콜롬비아는 적도 근처 나라라서 국토가 좁아 보이는구나~ 아! 메르카토르도법 아시는구나! 나 좀 지리 잘 공부한 듯? ㅎㅎ' 했는데,



 그게 아니란다.

 






 보고타에서 메데진까지는 직선거리로 245km, 


도로를 따라 가면 도로마다 다르지만, 구글 지도에 따르면 418~555km 정도. 






 

 기껏해야 서울에서 부산 정도의 거리. 


게다가 메데진은 콜롬비아 제2의 도시, 진짜 부산 같은 곳임.


 그런데 10시간이라고?  ㅎㅎ 리얼리? 








현실은 10시간은 개뿔 12시간 걸렸음.



리얼루다가...



 ① 일단 지형이 산 등이 많은 지형이라 도로를 곧게 내기 힘든데다가, 


 ② 나 있는 도로들의 상태도 그닥 좋지 않고,


 ③ 중간에 소소하게 점심 시간도 한 시간 정도 있는데다가,


 ④ 제일 중요한 이유같은데, 버스가 시도 때도 없이 서서 사람을 태우고 내린다. 어림잡아 4~5번 정도는 멈춘 듯. 마치 부산 가는 버스가 완행버스고 천안 논산 김천 뭐 이런 데 정차해서 시내에 파고들고,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고 보면 됨.




 후... 처음에 고속도로 톨게이트 비스무리한 게 보이길래, 설마 10시간보단 빨리 가겠지 하고 약간의 기대를 했는데, 역시 남미에선 그런 기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던 거임 ㅋㅋㅋㅋㅋㅋㅋ ^-^;


 12시간 동안 쓰러져 자다가, 듀오링고 하다가, 쓰러져 자다가... 만 반복했던 것 같다. 너무나도 무료한 시간이었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찍은 보고타 외곽 지역의 모습. 뭔지 모르게 황량해 보인다.



 출발한 지 한 시간 가량 되었을 때. 보고타에서 메데진 가는 길은 전체적으로는 내리막길이고, 중간중간에 이렇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지형도 많다. 지형이 계속 변화해서 창밖을 멍-하고 내다보고 있기는 좋은 것 같다. 그래봐야 12시간을 이렇게 버틸 순 없지만. 


 중간에 들른 식당. 여기서 내렸는데 너무 더워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해발 고도 2천 미터가 넘는 보고타에서 며칠 생활하다가 저지대로 내려오니 그야말로 기후 쇼크였다. 메데진이 이만큼 더우면 어쩌지 했는데, 알고 보니 메데진도 해발 고도 1천 5백미터라 (설악산 빼기 200미터 ^_^) 보고타보다 딱 적당히 더 따뜻하고, 숨 막힐 정도는 아니었다. 후 괜히 쫄았네.


 식당에서 먹은 음식. 말이 잘 안 통해서 당근 고기빳따죠! 하고 그림을 보고 고기를 시켰는데 좀 짰지만 괜찮았다.


 감자튀김 왼쪽에 있는 건 플랜테인(plantain) 이라는 걸 튀긴 것이다. 플랜테인은 생긴 건 그냥 큰 바나나처럼 생겼는데 맛이나 질감이 바나나랑 많이 다르다. 콜롬비아 여행하면서 만난 많은 외국인들이 플랜테인 칩을 엄청 잘 먹던데, 나는 뭐 못 먹을 건 아니지만 입에 잘 안 맞더라. 고기, 감자, 샐러드부터 먹고 배가 비면 좀 먹는 정도. 



왼쪽이 바나나, 오른쪽이 플랜테인.


 어쨌든 배를 채우고 다시 자다 깼다를 반복했다.



 버스에서의 마지막 사진. 어딘지 모를 도시. 콜롬비아의 도시들은 계곡에 위치한 경우가 많아서, 도시의 전경을 이렇게 볼 때나, 아니면 도시 내에서 주변을 둘러볼 때 되게 멋있더라. 사는 사람들은 생각이 다르겠지만.







 오후 9시에야 겨우 메데진에 도착했고, 우버를 잡아 호스텔로 향했다. 


 아마 이 때부터 진짜 기사 아저씨들이랑 얘기하는 거 맛이 들었던 것 같음. 어차피 비슷한 말들 나누며 시작하니까 대화 시작할 때 언어 부담도 덜 하고, 딱히 할 것도 없으니까 계속 얘기하게 되고. 스페인어 느는 데 직빵이다. 물론 강도 당하는 거 다음으로 말이지.





 호스텔에 도착하니 4인 도미토리인데 한 명만 있길래 인사하고, 듀오링고 좀 깨작대다가 잠에 들었다. 메데진 오는 12시간짜리 버스에서 낮잠 그렇게 많이 잤는데 워낙 잠을 좋아해서인지 별 소용이 없더라. 내일 투어 어디서 출발하나 체크하고 바로 꿀-잠.


 어쩼든 보고타를 탈출했고 새 장소에 왔으니, 아직 마무리가 덜 된 일들은 가슴 속에 접어 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자기 전 듀오링고가 준 너무나도 적절한 문장. 지난 일은 지난 일로!






드디어 보고타 탈출!




꼐속


  1. 돕바왕 2018.10.03 16:47 신고

    오.. 플렌테인 미국에서 덜익은 바나나인줄 알고 샀다가 '왜 바나나가 안 익지... '하고 기다린 적 있어요 ㅋㅋㅋㅋㅋㅋ

    • Favicon of http://suomessa.tistory.com BlogIcon 테빈 2018.10.03 22:27 신고

      않이 돕빠왕이라니 이거 저 놀리는거죠 여신님?

  2. s로 가즈아~ 2018.10.07 14:19 신고

    루시아 덕분에 보고타 탈출 잘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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