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벅스 버니는 매우 유명한 캐릭터이다. 그러나 디즈니 사의 캐릭터가 아니므로, 당연히 디즈니랜드에서는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성인들을 대상으로 심리학자들이 '디즈니랜드에서 벅스 버니를 볼 수 있다.'는 광고지를 보여 준 뒤, 예전에 디즈니랜드에서 벅스 버니를 본 적이 있냐고 질문하였을 때, 30~40%는 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광고지를 보여 주지 않은 집단에서는 오직 10%만이 벅스 버니를 디즈니랜드에서 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2. 1990년대에 미국의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아버지들을 유년기에 자신들을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고소했다. 지목받은 아버지들은 격렬하게 혐의를 부정했지만 사회적으로 이미 매장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한 여성은 자신의 친부가 유년기에 자신을 두 번 임신시켰고 모두 낙태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산부인과 검사 결과 그 여성은 임신을 한 적도, 성관계를 가진 적도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의 대부분은 '심리 장애는 유년기의 억압된 성적 학대 기억으로부터 발생한다.'는 편견과 확신을 지닌, 그러나 선의의 치료사들이 '유년기의 성적 학대'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가짜 기억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낸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Loftus) 박사는 실험을 통해 수없이 많은 사례에서 기억이 조작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3. 엘리자베스 박사가 한 실험의 한 사례가 아마 이번 사례와 가장 비슷할 것이다. 정지 표시가 있는 교차로를 자동차가 통과하는 동영상을 보여 주면서 그 표시가 양보 표시였다는 암시를 포함한 질문을 하자 대부분의 피험자들이 동영상의 표시가 양보 표시였다고 응답했다.


4. 기억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취약하다. 정말 엄청나게 취약하다. 이는 '생생한 기억'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기억은 쉽게 조작된다. 벅스 버니가 나타난 광고지나 심리 장애의 가장 유력한 원인은 성적 학대이며 당신도 경험이 있을 것이라는 권위있는 주장처럼, 약간의 실마리가 오기억 형성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오기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그 기억의 신빙성을 밝히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사실은 잘못된 기억을 더 굳히는 피드백을 강화할 뿐이다. 엘리자베스 박사에 따르면, 기억은 녹음기가 아니라 오히려 위키피디아에 가깝다.


5.
(1) '기표 칸이 좁았다.'는 것은 모두의 공통된 느낌이다. 그렇게 느꼈던 것을 기억한다. 기표기가 너무 두꺼워서 더욱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또한 나도 나름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내 기표가 칸의 아랫쪽 경계에 살짝 걸쳤고,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 그렇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선거 제도에 대해 쓸 데 없이 관심을 많이 갖고 있었고, 그래서 투표용지가 바뀐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공백에 조금 걸쳤지만 저번 선관위 발표대로라면 유효표로 인정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 그러나 투표용지 같은 것에 별 관심이 없다면 말이 다르다.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가장 강력한 감정은 내가 느꼈듯이 '기표 칸이 좁았다.'는 것, 그래서 칸을 벗어날까봐 걱정했다는 감정이고, 사실 기억하는 게 이 것밖에 없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이 때 '사실 칸이 붙어 있었다.'는 약간의 자극은, 예전 선거들에서는 여백이 없었다는 익숙한 사실과 더해져, 투표용지를 관심있게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오기억을 형성하기에 매우 충분하다. 투표용지가 이상하다는 주장은 민주당의 열성 지지자들에게서 많이 보이는데, 이 또한 기존의 행정부나 선거제도에 대한 불신이 오기억 형성의 추가적인 실마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①투표용지에 대한 논란을 인지한 뒤 투표한 사람들은 여백이 없는 투표용지를 본 적이 없었던 점, ②확신에 차서 투표용지가 잘못되었다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실제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아래와 같은) 합성 투표용지를 만들어서 보여 주자 어색함을 느끼고 자신들의 주장을 번복했다는 점, ③인터넷 상에 여백이 있는 투표용지의 사진은 있지만 여백이 없는 투표지의 사진은 보이지 않는 점(기표소 외에서의 기표 전 촬영은 처벌받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처벌받더라도 이렇게 명백히 이상한 경우라면 누군가는 촬영했을 것이다.), ④그리고 이 논란을 언급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좁아서 기표가 빗나갈까봐 걱정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이 사례가 전형적인 오기억 사례임을 보여준다. 

(4) 그러나 SNS로 이런 오기억이 급격히 확산되었다는 점에서는 또 다른 주제로 연구할 가치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5) 이번 사건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억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깨닫게 되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된다면 바랄 나위가 없겠다. 이런 건 쓸데 없는 전통윤리 가르칠 시간을 빼고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6. 오기억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박사의 TED 강연을 들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단 17분만에 매우 유용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한국어 자막이 있고 시간이 아깝다면 강연 내용을 글로만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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