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을 보았다.

전쟁닦이로 불릴 만큼. 문제점이 굉장히 두드러지는 영화다. 가장 거슬렸던 건 너무나도 산만한 교차편집과 부실한 설명, 감정의 발달이 느껴질 시간도 주지 않는 스토리의 급전개, 뜬금 로맨스.

그래도 블빠면 볼 만 하다고 느꼈다. 워크래프트를 고오급진 영상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희열을 불러일으키고, 산만한 스토리도 어차피 배경지식이 있으면 이해에는 무리가 없다. 무엇보다 후속작이 계속 나와야 아서스도 나와서 썩씨딩 유 파더도 해 주고 쓰랄도 일리단도 나올 게 아니겠는가. 그 일념으로 동생을 꼬셔서 티켓값을 흥행실적에 보탰다.






 

 ※ 아래의 글은 기본적으로 제가 2011학년 2학기에 학교에서 종교학 교양수업인 '인간과 종교' 수업을 들으면서 작성한 영화 『밀양』에 대한 감상문의 내용입니다.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들은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화 『밀양』포스터

 

  I. 들어가는 말

 

  기독교는 “신은 존재하며, 전능(全能)하고 전선(全善)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수많은 고통과 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연이 천재지변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뿐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도 부패, 탐욕, 갈등이 만연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의 문명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20세기는 물질적 풍요가 찾아온 시기였으나, 두 차례의 참혹한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원자 폭탄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지요.


  거기에 이토록 세상에 만연한 고통과 악은 항상 선한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에게 전가되어 왔습니다. 당장 지금의 세계에서도 가장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폭력적인 정치인들이나 일부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이 아니라, 죄 없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이지요. 멀리 볼 것 없이 한국 사회에서도, 선한 사람일수록 손해를 보고, 악하게 행동할수록 이익이라는 관념이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습니다.


  고통을 선신과 악신의 투쟁으로 설명하는 조로아스터교나, 환상 또는 무지의 소치로 설명하는 힌두교와는 다르게, 유일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은, 사랑과 공의를 지닌, 전능한 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현존하고 있다는 모순에 직면합니다. 이러한 모순이 명약관화한데, “전능하고 전선한” 신이란 과연 존재하는 걸까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II. 영화에서 나타난 고통과 신정론(神正論)

 

신애와 준, 종찬

  영화의 주인공인 신애(전도연)는 남편을 잃고 아들 준과 같이 남편의 고향이었던 밀양으로 내려옵니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어린 아들 준은 비록 평소에 말이 별로 없는 아이이긴 하지만, 죽은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웅변 대회에서 어머니를 기쁘게 하고, 숨바꼭질 장난을 쳐서 어머니를 놀리는 등 발랄하고 착한, 신애에게 더없이 사랑스러운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돈을 노린 웅변학원 원장에 의해 유괴되어 살해당하자, 남편의 불륜과 사망이라는 두 번의 아픔을 겪은 데다 470만원밖에 되지 않는 은행 잔고가 보여주듯이 경제적 고난마저 겪고 있던 신애는 정신이 붕괴하는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지요.


  그런 신애가 의지하게 된 것은 종교입니다. 아직 준이 살아 있을 때에는, 이웃 은혜약국의 약사 부부 중 아내가 신애에게 하나님을 믿을 것을 권하며 책을 선물했음에도, 신애가 약사의 권유를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준의 피살이라는 극한의 정신적 고통과 직면한 신애는, 사망 신고서를 제출하던 길에 약사에게 참석을 권유 받았던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의 현수막을 보고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고, 거기에서 감정의 폭발과 함께 회심 체험을 하게됩니다. 이후 신애는 교회 모임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말, 전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요, 이제는 확실히 알았어요.”라고 말하며, 회심 체험을 강조하고 자신이 겪은 고통에는 신의 뜻이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여기에서 신애가 받아들이는 담론이 바로 신정론(神正論, Theodicy)입니다. 신정론은 약사가 신애에게 기도회에 올 것을 권유하는 장면에서 처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면 왜 죄가 없는 준이를 처참하게 죽게 했는가?’라는 신애의 질문에, 약사는 비록 그 이유를 지금 알 수는 없지만, “세상에 주님의 뜻 아닌 것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지금의 상황이 겉보기에는 모순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종교적으로 논증하는 것이 바로 신정론입니다. 성경에서는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로 유명한 욥기가 대표적입니다.

 

  여러 맥락에서 등장하는 신정론들은 크게 자유의지 신정론, 교육 신정론, 종말론적 신정론, 신비 신정론, 친교 신정론으로 범주화할 수 있는데, 이 중 영화에서 등장하는 것은 대체로 신비 신정론에 가까워 보입니다. 신비 신정론이란, 인간의 인지 능력의 한계와 신의 무한성으로 인해 인간은 신의 엄청난 뜻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는 판단을 유보하고, 모든 설명을 신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죠. 이는 약사가 말한 맥락에서 가장 가까운 신정론입니다.

 

아들의 사망신고를 하며 멘붕한 신애. 이 장면 이후 신애는 기도회에 가서 교회에 귀의하게 됩니다.

  신애에게 일어난 일을 신비 신정론이 아닌 다른 신정론적 맥락에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교육 신정론의 맥락에서, 초기 교부인 이레나이우스(Irenaeus)는 인간이 도덕적∙영적으로 완성되는 과정에서 악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의 완성은 고난과 시험에서 도덕적 선택을 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이러한 도덕적 성장을 위해 신이 마련한 것이 ‘물리적 악’이란 것입니다. 한편 ‘물리적 악’과 구별되는 ‘도덕적 악’은 신이 내린 고난과 시험의 과정에서 바람직한 선택을 하지 못한 자들의 상태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따라서 선과 악은 섞인 상태일 수밖에 없으며, 악은 인간의 완성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됩니다. 이를 영화에 적용하면, 준이의 죽음은 신애에게 주어진 ‘물리적 악’이 되고, 신애는 그런 악에 대해 신에 귀의함으로써 영적인 성숙과 자각을 이룬 것이지요. 지금의 세계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이며, 악은 더 큰 신적 질서를 위해 필요하며, 그로써 선은 더욱 완전해질 수 있다는 라이프니츠(Leibniz)의 주장도 이러한 맥락에서 연장되어 해석될 수 있습니다(민순의, 2007: 219~222).


  영화에서 신애는 “이제는 정말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 아래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어요.”와 같은 대사에서 볼 수 있듯이, 진심으로 신정론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러한 강렬한 믿음을 바탕으로, 준을 살해한 웅변학원 원장조차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지요. 그리고 여기에서 또다른 비극이 시작됩니다.

 

 

  III. 신정론에 대한 비판과 인간적 가능성

 

  모든 일에는 신의 섭리가 있다고 믿게 된 신애는 웅변학원 원장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에 그를 직접 면회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면회에서 신애가 용서하고자 했던 웅변학원 원장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신애는 극심한 배신감을 느끼며 면회 이후 쓰러지게 되지요. 즉, 신애는 직접 고통을 받은 자신이 범인을 용서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용서하고 구원을 주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애의 모습은 하나님은 범죄자의 편이지 피해자의 편이 아니라는, 인도 철학자 라즈니쉬(Rajneesh)의 기독교 비판과 통하고 있습니다(오죠 라즈니쉬, 1995: 250~251; 민순의, 2007: 230~231에서 재인용).

 

  면회 이후, 신애가 교회에서 얻었던 마음의 평안은 사라져 버리고, 신애는 다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교회에서 시끄럽게 의자를 쳐 소리를 내거나, 기도회에서 음향 기기를 몰래 조작하여 ‘거짓말이야’라는 가사가 나오는 노래를 틀거나, 은혜약국 약사 부부 중 남편을 유혹하여 성관계를 맺고자 시도하면서 신을 저주하는 모습은 용서의 기회를 빼앗긴 신애의 절망과 증오,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들입니다.

 

  결국 신애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 주체적으로 결정한 기회를 한 번도 갖지 못한 채, 준이의 죽음도, 범인의 평온함도 모두 신의 섭리, 신의 용서로 해결되는 비인간적 상황에서 자신의 팔을 칼로 자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붕괴하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영화는 신정론이 인간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영화의 원작인 〈벌레 이야기〉를 지은 이청준도 이러한 문제 의식으로 집필을 시작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그가 우연히 본 ‘용서받은’ 사형수를 언급하며, ‘하나님 또한 그를 정말 용서했고, 그럴 권리가 있을까! 그 섭리자의 사랑 앞에 사람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과 권리는 무엇인가!’라며 절대자의 ‘섭리’와 ‘사랑’이라는 것이 인간의 주체적 존엄성을 짓밟는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애는 ‘제 울음소리조차 낼 수 없는 피투성이 인간의 영혼’의 단적인 표상이 됩니다(이청준, 2007: 4~5).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에서 나타난 메시지는 종교학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 인정론(Anthropodicy)입니다. 인정론이란, 고난에 대해 신의 문제를 개입시켜 설명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이 직면하는 고통과 고난을 철저히 인간적 물음으로 보고, 고통 해결을 위한 논의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정론적 의미에서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영화의 감독인 이창동이 자신의 영화에 대해 “이 영화는 신애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신애와 종찬의 이야기다.”(이창동∙허문영)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종찬입니다. 이청준의 원작에서 아내 곁에 있는 사람은 객관적 관찰자에 불과한, 아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남편이지만, 영화에서는 투박한 종찬이 신애의 곁을 맴돌며 그녀를 지탱해 줍니다.


  송강호가 분한 종찬은 신애가 직설적으로 지적했듯이 속물입니. 영화의 초반부터, 밀양이라는 지명을 ‘비밀의 볕’이라고 해석하는 다소 낭만적인 신애와, 밀양에 대해 “한나라당 도시고, 경기는 나쁘고,…” 등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종찬은 확연한 대비를 이루며, 그의 속물적 이미지를 드러냅니다. 종찬은 신애가 밀양에 왔을 때부터 관심을 보이며, 신애의 피아노 학원에 가짜 상패를 내걸고, 지역 유지를 소개해 주며 이런 사람을 알아야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속물적인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찬은 신애와 지내면서 속물성을 점차 벗어나는 변화를 겪습니다. 이러한 종찬의 변화가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서 다방 종업원의 속옷을 훔쳐보며 희롱하는 모습을 보이던 그가, 짝사랑하던 신애가 절망의 끝에서 육체적으로 유혹할 때, 정신을 차리라며 호통을 치고 물건들을 부수면서까지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장면입니다. 처음에 신애에게 품었던 단순한 연정에서 벗어나, 종찬은 신애의 절망과 고통을 함께 하면서, 인간적인 교감을 할 수 있는 동반자로 거듭난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기 직전, 혼자서 머리칼을 자르려고 하지만 거울이 잘 보이지 않는 신애의 곁에서 종찬이 거울을 조용히 들어주는 장면은 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김희선, 2009: 186~187).

 

 

  IV. 맺는 말

 

〈밀양〉은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서 출발합니다. 영화는 아들의 유괴와 피살이라는 극한의 고통의 상황에서, 그에서 헤어나오려는 몸부림을 조명하면서, 고통과 용서, 구원의 문제라는 근본적 문제를 우리 앞에 제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직면하여 신에게 의지합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드러나듯이, 고통을 무한하고 완전한 신의 섭리로 환원하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또다른 폭력일 수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받는 고통에 싸워야 하는 주체도 인간이라는 것, 고통에 대한 용서의 주체도 인간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신정론 등 지나치게 신에게 지나치게 의지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원작 〈벌레 이야기〉에서 〈밀양〉의 신애에 해당하는 알암이 엄마는 절대자 앞에서의 ‘벌레’와 같은 삶의 고통을 자살로 끝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밀양〉은 신애를 끝까지 돕는 종찬의 존재를 통해 인간 삶의 긍정적 측면을 드러내고, 결국 인간의 구원은 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싸우고 극복하는 인간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들간의 연대와 소통에서 그러한 구원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김희선, 2009: 188). 절대자인 신이 찬란하지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사막의 열사라면, 불완전한 종찬은 신애가 살아 있을 수 있도록 하는 ‘비밀의 볕(密陽)’인 것이지요.

 

 

  참고 문헌
 
김희선, 「용서와 인간실존의 문제에 대한 두 태도」, 『문학과 종교』 제14권 제2호, 한국문학과종교학회, 2009년.
민순의, 「영화 《밀양》이 제시하는 인간학적 성찰」, 『종교와 문학』 제13호,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2007년
서광선, 『종교와 인간』,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9년. 
이기성, 「신정론: 기독교 신앙과 악의 문제에 대한 고찰」, 『성령과 신학』 제25호, 한세대학교 영산신학연구소, 2009년.
이창동∙허문영, 「이창동 감독∙영화평론가 허문영 대담 – 유괴는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고통이다」, 『씨네21』, 2007. 5. 15.,  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46374
이청준, 최규석 그림, 『밀양 –원제「벌레이야기」–』, 열림원, 2007년.

 

밀양 - 10점
이청준 지음, 최규석 그림/열림원


밀양 (2007)

Secret Sunshine 
7.7
감독
이창동
출연
송강호, 전도연, 조영진, 김영재, 선정엽
정보
로맨스/멜로, 드라마 | 한국 | 142 분 | 2007-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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