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을 보았다.

전쟁닦이로 불릴 만큼. 문제점이 굉장히 두드러지는 영화다. 가장 거슬렸던 건 너무나도 산만한 교차편집과 부실한 설명, 감정의 발달이 느껴질 시간도 주지 않는 스토리의 급전개, 뜬금 로맨스.

그래도 블빠면 볼 만 하다고 느꼈다. 워크래프트를 고오급진 영상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희열을 불러일으키고, 산만한 스토리도 어차피 배경지식이 있으면 이해에는 무리가 없다. 무엇보다 후속작이 계속 나와야 아서스도 나와서 썩씨딩 유 파더도 해 주고 쓰랄도 일리단도 나올 게 아니겠는가. 그 일념으로 동생을 꼬셔서 티켓값을 흥행실적에 보탰다.






1.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 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다. 기쁘다.

2. 다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한강이 받은 상은 '인터내셔널' 상이라는 점. 원래 맨 부커 상은 영어권 작가들에게만 수상되는 상이고, 인터내셔널 상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생긴 상이다. 그러니까 '맨 부커 상'이 권위와 역사가 있는 상인 건 맞지만 그 권위와 역사가, 신설된 인터내셔널 부문까지 자동으로 (언론들이 노벨 문학상과 동급이라고 설레발칠 정도로) 세계 최고의 상으로 만들어 주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어느 정도 큰 상임은 사실이고, 경쟁한 작가들을 봤을 때는 정말 최고 클래스의 상 중 하나긴 한데, 이건 권위 없는 상도 좋은 작가 꼽으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3. 그래도 내가 기쁜 건 이 기회로 사람들이 그래도 이 책을 전보다 많이 읽을 것 같아서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감정은 굉장히 복잡했는데, 맨 부커 상에서 얘기한 것처럼 정말 '아름다우면서도 잔인한' 이야기에 읽기를 멈추지 못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내가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인, 소속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은 생각도 들었기 때문인데, 이런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조금 더 늘어나지 않을까 싶어서.

4. 평범해 보였던 어떤 현대인이 구도(救道)에 모든 것을, 삶의 마지막 불꽃까지 바치는 모습을 내가 지켜볼 수 있다면 비슷한 느낌이 들까. 인간의 폭력의 본질에 대해 수십 년을 탐구한 작가가 제시한, 폭력을 피하기 위해 육식을 거부하다가 죽음, 또는 무(無)에까지 다가가는 주인공과 달리, 나는 육식의 맛을 그 어떤 맛보다도 좋아하고 뭐 폭력을 딱히 선호하진 않지만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매체들을 좋아하는 지극히 말초적인 감수성을(감수성도?) 지닌 사람이니까... 사실 그 "폭력을 거부하는 과정"에의 묘사가 매우 서늘하고 선명한 폭력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끌렸던 것이기도 하고. 나는 이러한 사람들의 감정과 느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노력하면 최소한의 진전이라도 맺을 수 있을까.

5. 채식주의자는 군생활 중 굉장히 드물게 내가 두 번 읽은 책 중 하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까먹어서 쓸 말이 없는 걸 보니 조만간 다시 읽어야겠다.







1.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소설)

대구에 내려갔을 때 동생이 사 놓아서 읽게 된 소설. 작가는 그린피스에서 활동할 만큼 열성적인 환경주의자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내용도 자연과 '양키' 또는 '읍장'으로 대표되는 야만적인 서구문명의 대결 같은 느낌, 그러니까 환경주의의 팜플렛 같은 느낌이었다. 구성과 전개는 좋고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는 비장미와 숭고미마저 감돌지만, 역시 자연 vs 인간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표현되는, 클리셰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등장인물들을 단순화시켜버린 환경주의적 이념 과잉이 느껴져서 읽고 나서는 글쎄... 별 세 개 정도 주고 싶다.


2. 김영하, 『보다』(에세이)

관찰력 + 글빨의 간지 시너지를 보여주는 김영하의 에세이집. 김영하의 비문학은 처음 읽는데, 소설의 내용들이 그렇듯이 글들이 날카로운 것 같다.


3. 다이허우잉, 『사람아 아, 사람아!』(소설)

소설을 읽으며 즐거움을 느낄 때 중 하나는 소설을 통해 한 때 존재했던 '다른 세상'에 대해 깨달을 때일 것이다. 옛 시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비문학으로 충분하지만, 그 세계에 살아 보기 위해서는 문학이 필요하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나오던 시절 서구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 총을 들고 외국의 전장으로 달려갔다. 마찬가지로 다이허우잉의 이 소설의 배경, 문화대혁명과 그 이후, 개방 전의 중국 사회 역시 지금과 거의 다른 세계이다. 대자보와 문예 비평, 휴머니즘과 마르크스주의를 놓고 싸우는 이 소설의 배경은 중국보다 오히려 처음 대학에 입학하던 시절의 캠퍼스를 떠올리게 했다. 물론 그 때만 해도 이미 운동권의 세력은 매우 약해졌지만, 자보는 어딘가에 계속 붙었고 자보를 읽는 사람도, 자보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시계를 2010년에서 20년 정도 더 뒤로 돌리면, 다이허우잉의 소설에 나오는 사회와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될 것 같다.

다만 그와 별개로 소설을 읽기는 꽤 즐겁지는 않았는데, 일단 내 독해력이 떨어져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문장이 매끄럽게 읽히지 않았고, 화자가 너무 자주 바뀌어서 혼란스러웠으며, 무엇보다 여러 개의 주 주제 중 '휴머니즘'과 '마르크스주의'가 서로 반대되는 것인지 조화하는 것인지에 대해 등장인물들이 다투는 것이, 이 소설의 배경이 정말 '옛날'이라는, 그러니까 현재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구나 하는 느낌을 주어서. 그렇게 치열하게 논쟁하고 투쟁하던 사람들, 교조주의자, 개량주의자, 수정주의자, 정통주의자들은 지금 중국 어디에 있을까.


4. 김애란 外 11인, 『눈먼 자들의 국가』(에세이)

세월호 사건에 관한 문인/학자들의 글을 모은 책. 의경은 정치적 중립 의무가 있기에 뭐라 의견을 쓰긴 그렇고, 다만 읽고 나니 박민규의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그런데 박민규보다 편혜영을 먼저 읽었네.


5. 우치타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철학 입문서)

철학에 대해 너무나 무지해서, 얇고 쉬울 것 같아 진중문고에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처음부터 저자도 구조주의에 대해 잘 모른다고 고백하며 들어가서 도대체 뭐하자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많은 것을 다루기보다는 핵심 개념 위주로 간략하게 다루는데, 투자한 시간에 비해서는 재밌고 괜찮은 책이 아니었나 싶다.


6. 칼 세이건, 『코스모스』 (과학)

내가 항상 닮고 싶었던, 항상 존경할 수밖에 없는 칼 세이건이지만, 코스모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처음. 무엇보다 나의 얕고 넓으며 여러 분야에 균질하지 않은 지식 때문에 어떤 부분은 아예 모르고 어떤 부분은 들어봤고, 이런 것들 때문에 코스모스를 읽기가 달갑지 않았지만, 말년 버프도 있고 해서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읽었다. 처음에 나오는 세네카의 인용구는 볼 때마다 항상 가슴이 뛴다. 항상 세계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품고 우리가 사는 세계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과학에 대해 항상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칼 세이건이 오래 살지 못하고 96년에 죽은 것이 너무나도 아쉽다. 지금처럼 다시 민족주의와 종교적 광신주의같은 극단적 이념갈등들이 분출하는 시대에 칼 세이건이 살아 있다면 그래도 합리적이면서 옳은 지식인이 어떤 사람인 지 모두가 알 수 있을 텐데.


7. 편혜영, 『재와 빨강』(소설)

읽는 동안 정유정의 『28』을 읽던 생각이 났다. 전염병을 다룬 소설이면, 그래도 문학이라면, 적어도 이랬어야지 하는 뒤늦은 불평. 물론 고종석이 말한 대로 그냥 문학이 하나의 기예일 뿐이라면, 정말 그러할 뿐이라면 서정주의 친일과 친군부 행보도, 수많은 문학인들의 추한 말로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인간의 본능인지 사회적 통념인지 뭐시긴지, 문학은 다른 예술 장르보다 문학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고상'해야 하고, 한 차원 높은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니까. 28을 읽는 동안에는 흔한 오락영화를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 오히려 시청각적 자극이 없으므로 더 따분한 느낌이 들었다면, 처음 읽은 편혜영의 이 소설은 단순한 질병-오락영화적 소설을 뛰어넘어, 전염병의 발생(outbreak)을 통해 인간의 조건과 카프카적 존재의 불안을 이야기한다. 스토리가 개운하게 끝나진 않지만, 숨 쉴 새 없이 빠르고 재미있게 진행되는 뛰어난 오락 소설이 아니라면, 소설이 끝나고 가슴 속에 응어리가 좀 남는 게 소설의 원래 목적에 부합하지 않을까.


8. 편혜영, 『아오이가든』(소설집)

7번 소설을 읽고 바로 집어든 편혜영의 소설집. 7번에서 불쾌하고 불결한 소재들만 다뤘던 것과 달리 이전에 쓴 8번 책에서는 시체, 구더기, 괴물, 이런 것들을 계속 다룬다. 역시 제일 좋았던 건 표제작 '아오이가든'. 뭔가 코스믹 호러 같기도 하고. 정말 우수에 차 보이는, 그래서 그런 쓸쓸하고 섬뜩한 소설만 쓰는 한강과 달리, 얼굴만 보면 굉장히 밝게 웃는 평범한 새댁 아줌마처럼 생겼는데 어떻게 이런 것들만 쓰는지 참으로 ㅎㄷㄷ하다는 나의 궁금증을 반영하듯이, 이 책에는 소설가 사진을 존나 어둡고 똥씹은 표정 짓고 있는 사진으로 해 놓은 게 함정.

12월 들어 2권을 더 읽어서 입대 이후 총 141권을 읽었다. 작년 이맘때의 생각보다는 적게 읽은 거지만 이 정도면 독서 쪽에서는 나쁘진 않았다 싶다. 공부나 운동을 망해서 탈이지...






2차세계대전사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   


8월에 읽은 책들
1. 존 키건, 1차세계대전사
2. 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
3.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 시
4.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 소설
5. 할레드 호세이니, 그리고 산이 울렸다
6. 토머스 조이너, 왜 사람들은 자살하는가?
7. 윤호정, 박광희 편역, 대한제국아 망해라
8. 니나 상코비치, 혼자 책 읽는 시간
9.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10. F. 스콧 피츠제럴드, 아가씨와 철학자


1.2. 먼저 존 키건의 양차 세계대전사는 볼륨 때문에 읽을 때 ㅎㄷㄷ했지만 읽은 보람이 확실히 있었다. 다만 전투 묘사 같은 건 의경이라 그런...건 아니겠고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특히 1차세계대전사의 경우 지도같은 것들이 많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다. 또한 80년대 후반에 쓰인 책이다 보니 최신 연구성과들이 없는 것도 읽을 때 감안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2차대전에서 독소전쟁 비중이 너무 적다...


3.4. 김연수의 책들인데, 김연수가 시나 소설들을 뽑고 거기에 짧은 글들을 붙인 것. 결론부터 말하면 솔직히 별로. 물론 시는 일단 내가 잘 모르는 것도 있고... 짧은 글들이 재치있는 글들도 많은데 뭔가 굳이 이 책을 봐야 하나 싶다. 다른 산문집들도 어마어마하게 많으니까. 다만 소설편 뒤에 있는 저자의 말은 굉장히 공감갔다. 자신이 비관, 비관, 비관만 하다가 긍정주의자가 된 이야기.


5.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에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었었는데, 그 때도 인상깊었지만, 좀 더 다양한 소재들과 시간들을 포괄하는 이야기. 비단 아프가니스탄에 국한된 감성이 아니라 보편적 감성을 풀어내는 느낌.


6. 나를 이해하기 위해 읽었다.


7. 제목이 자극적이긴 한데, 결국 한말의 여러 비사, 야사들을 당시 '우국지사'가 모아놓은 책. 제목이 너무 자의적인 것 같은게 윤호정은 여러 이야기들을 모아 놓아서 어떨 때는 고종이나 민비(명성황후)가 병맛일 때도 있는데 어떨 때는 괜찮아 보이기도. 비록 단편적이고 체계는 없으나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 사회상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는 괜찮았지만, 굳이 샀어야 했나 싶다.


8. 1년동안 하루에 1권씩 책을 읽고 서평을 쓴, 전직 변호사 엄마에 관한 책. ㄷㄷ하다 나도 언젠가 이런 1년을 보내 봐야지 하고 생각만 합니다.


9. 맨부커상 수상작이라서 기대했고, 어느 정도는 기대가 충족되었던 소설책. 그런데 너무 막장드라마 같기도 하고... 어떻게 그런 인과관계가 있었는지 납득이 안 가서, 쉴새없이 읽어내린 후 덮고 나서 속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10. 피츠제럴드의 단편들은 읽을 때마다, 발랄하게 튀면서도 가슴에 잘 스며드는 것 같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때도 피츠제럴드 식의 아름다움에 취했었는데, 비교적 초기작들인 이 책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읽으면 읽을수록 1920년대의 미국 사회에 대한 향수병 비슷한 게 생길 것 같다.





 

방황의 시대, 한 친일 지식인의 내면 읽기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윤치호 일기)를 읽고
 

 

1. 시작하며 - ‘힐링’ 열풍과 ‘이념의 부재’


 ‘힐링’ 열풍이 거세다. 젊은이들은 끊임없는 아픔을 토로하고, 이를 달래 주려는 ‘멘토’들도 끊임없이 넘쳐난다. 힐링 서적, 힐링 프로그램 등이 도처에 범람하는 풍경이 어느덧 우리 시대의 초상이 되었다.


 물론 젊은이들의 방황이 우리 시대에만 고유한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요즘만큼 심했던 적이 있었을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삶의 방향을 잃고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은 채 그저 살아가기에만 급급하다.


 나는 이런 현실이 ‘이념의 부재(不在)’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젊은이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개인의 삶을 국가적·민족적 규모에 통합시켰던 전통적 이념들이 있었다. 국가가 주도한 경제성장 신화와 대학가를 지배했던 민주화 투쟁 등이 바로 그런 이념들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젊은이들은 선진 경제나 민주사회 건설에, 또는 둘 다에 뛰어들어 청춘을 불살랐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우리 경제가 선진 수준에 접어들면서 전통적 이념들은 힘을 잃었고, 그 자리를 채운 소비문화는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지’ 지침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문제를 파악한다면, 오늘날 젊은이로서 방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힐링’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소에 이런 생각을 품고 있던 나에게 『물 수 없으면 짖지도 마라』(이하 ‘윤치호 일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 민족사 최대의 격변의 시대였던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그 시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민족 지도자였던 윤치호의 진솔한 생각들과 고민들이 글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일기 속의 그 역시 방황하는 한 사람이었고,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과 민족의 미래를 항상 고민했다. 비록 거의 100년 전의 일기였지만, 그의 일기를 읽으면서 때로는 그에 공감하고 때로는 안타까워하며, 그의 일기와 상상의 토론을 벌일 정도로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아직 나도 삶의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이 일기를 통해 더 깊은 고민의 재료와 삶의 실마리를 얻게 된 것 같다.
 

 

『윤치호 일기』  좌옹 윤치호

 

 


2. 윤치호의 삶과 ‘윤치호 일기’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는 19세기 후반에 중국, 일본, 미국에서 유학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의 의장을 거친 개화운동의 핵심 인물이며, 조선YMCA 회장으로서 기독교계의 최고 원로였다. 그러나 이처럼 다채로운 경력을 지닌 그는 105인 사건으로 일본 당국에 체포되었다 석방된 뒤 3·1 운동을 반대하는 등 소극적 친일로 돌아선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각종 친일 단체의 간부를 역임하는 등 완전히 친일 대열에 합류하여, 1945년에는 일본제국의회 칙선의원으로 선임될 정도로 친일파의 거두가 된다.


 그는 60여 년간 일기를 썼다. 보통 사람들은 한 달 계속 쓰기도 버거워하는 일기를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줄곧 썼다는 점에서 그의 남다른 면모가 보인다. 감리교 신자였던 그는 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항상 되돌아보고 반성하려 했다. 일기는 중간에 몇 번 끊기면서도 계속 지속되는데, 당대의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 소문들, 그리고 그에 대한 윤치호의 생각들이 상세히 쓰여 있다. 그런데 비밀을 지키고 싶어서였는지 일기의 대부분은 영어로 쓰여 있어, 지금까지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김상태가 편역한『물 수 없으면 짖지도 마라』는 이 중 1919~1943년 분량을 발췌·번역한 것이다. 이제 일기에 담긴 그의 생각을 따라가 보자.
 

 

영어로 쓰인 윤치호 일기

 


3. ‘윤치호 일기’에 나타난 그의 사상


 윤치호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생각했다. 열강들이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마음대로 침략하던 당시에 그의 생각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감리교 목사들이 아프리카에 선교사를 파견하면서도 정작 ‘미국에서 흑인들을 모두 쓸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것을 잊지 않는다. ‘인간에게 과학을 주면 독가스와 폭탄을, 인간에게 사회주의를 주면 볼셰비키 지옥을 만들 것’(1933/11/8)이라고 쓴 일기는 그의 생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따라서 그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3·1운동을 반대했다. 당시 민족 지도자들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에 심취하여 조선이 곧 독립될 것이라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조선 독립 문제가 파리 강화 회의에 상정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만세를 외쳐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민족은 없을 것(1919/3/2)’이라고 냉소적으로 평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과잉 진압으로 동포들이 겪는 고통에 분노하며 비통해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는 또한 일본이 조선을 오직 일본인의 이익만을 위해서 경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일본의 효율적 통치가 고종의 부패한 통치보다는 낫다고 보았다. 결국 그의 결론은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조선인들은 ‘이조 오백년간 배관열(拜官熱)만 발달’하여 호전성이 뿌리 뽑힌 민족으로, 정치적 담론에만 관심이 있을 뿐 실제 근대 국가를 운영할 상업·공업·행정·군사적 측면에서는 무능하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 ‘마사리크가 연설을 잘 해서’라고 믿는 우스운 사람들이 있다며, 이는 꾸준한 실력 양성 덕분이고, 조선인들도 독립을 이루려면 단기간에 근대화를 이뤄낸 일본인들에게 근대 문명을 배우면서 실력을 양성하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이 독립되지 못한다면, 일본이라는 대제국 내에서 ‘영국의 아일랜드가 아니라 영국의 스코틀랜드(1943/3/1)’처럼 다양성을 지니고 공존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우리 조선인이 아직 정치적 독립을 위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몇 가지 확실한 증거가 있다. (1) 일부 지역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조선이 독립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 잘못 안 것이다 - 지방 공무원들이 자기들에게 ...심게 했던 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렸다. 이 무식한 사람들은 너무 몰상식한 나머지 정작 독립이 되면 나무가 더 많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 1919년 5월 5월 10일 일기

 

기고자는 조선 민족에게 정력과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결정적 증거로서, 300여 년 전에 일본 침략자들이 땅바닥에 팽개쳐놓고 간 서울 파고다공원 탑의 상부 3층 옥개석을 조선인이 지금껏 그대로 방치해온 사실을 들었다. 이 논지가 맞는 건 사실이다. - 1920년 9월 22일 일기

 

조선인은 장난감이 큰 이윤을 남길 수 없는 시시한 품목이라는 이유로 장난감 만드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조선인은 대기업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감히 대기업을 운영할 수도 없다. 결국 조선인은 '안하는' 것과 '못하는' 것 사이에서 어영부영하다가 점점 이 분야에서 소외되어간다. - 1920년 12월 11일 일기

 


 이런 현실 인식을 갖고 있던 그에게 1940년대의 대일 협력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었다. 그는 일본의 군국주의 통치가 심화되어 조선인 탄압이 강화되자 한 편으로는 조선인의 호전성과 군사적 능력을 함양하기 위하여, 한 편으로는 일제 치하에서 조선인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원병제와 창씨개명에 찬성하고 총독부의 요구에 순응하며 학도 지원병 입대를 독려하는 글들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4. 윤치호의 선택에 대한 나의 생각


 윤치호 일기를 읽고 나서 윤치호를 미워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의 우리 민족과 국토에 대한 사랑, ‘애국에는 여러 길이 있다.’는 그의 생각, 강점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속한 조직과 가족을 지켜야 했던 그의 고민들이 일기를 통해서 진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지향 교수가 『윤치호의 협력일기』에서 논하듯이, 서구 사학계에서는 1970년대 이후 탈식민주의 역사 이론이 대두되면서, 강점기에 협력자의 위상이 재평가되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나치 점령기에 드골을 중심으로 일부를 제외한 모든 국민이 나치에 저항하고 해방을 갈망했다는 ‘4천만의 저항’이라는 신화가 68운동으로 인한 드골의 하야 이후 재평가되면서, 협력의 가치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실제로는 나치 점령기에 소수만이 나치에 저항했으며, 대부분은 관망하거나 소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당시 나타난 협력과 저항의 구조는 선악 대립 구도로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았으며, 양면성과 다양성을 지닌다는 견해가 부각되었다. 마찬가지로 윤치호는 친일 노선을 따르면서도 시종일관 자신이 이완용 같은 반민족적 친일파와는 다르다고 생각했고, 스스로를 민족의 안녕과 실력 양성을 위해 매진한 애국자라고 생각했다.

 

 

서울대학교 박지향 교수      『윤치호의 협력일기』


 윤치호의 일기를 읽으며, 친일파들을 단순히 ‘친일파’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일파를 단죄하는 것만큼 그들의 다양한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느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협력과 저항을 동일한 지위에 둘 수는 없다.


 일부 주장처럼 협력과 저항이 모두 애국적 행동이었다고 하더라도, 협력과 달리 저항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윤치호는 일기(1919/7/31)에서 ‘105인 사건 이후 나에겐 저항할 용기가 없어졌으며, 연로하신 어머니와 어린 아이의 건강과 행복이 무척 중요하다.’며 자신의 공포를 시인했다. 이에 비해 저항은 죽음이라는 본질적 공포를 극복해야만 결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저항을 택한 수많은 독립투사들은 윤치호와 달리 독립을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했다.


 또한 협력이라는 윤치호의 결단은 국제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는 다르게 여러 오류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그는 ‘민주주의로 성공을 이룬 나라는 영국과 미국 뿐(1945년 서한)’이라 주장했지만 이는 소위 ‘성공’의 범주를 매우 좁게 본 결과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은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않고는 완성될 수 없음을 외면한 발언이었다. 실제로 독립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많은 부침을 겪었지만 결국 1987년 이후 성공적으로 정착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요컨대 그의 협력에는 민족성에 대한 부정적 편견, 현실과 유리된 국가관, 공포에 저항할 용기의 부족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5. 글을 맺으며


 윤치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뛰어난 지성을 가진 민족 지도자였음에도, 역사의 갈림길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그의 선택은 그 스스로도 진정성을 갖고 한 것으로 충분히 이해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결코 옳은 선택은 아니었다.


 동시대인으로서 옳은 선택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무장 독립 운동을 진행한 사람들도 있었고, 실력 양성 운동을 진행하면서도 일제 말기에 협조하지 않으며 변절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핵심적 차이가 용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윤치호는 현실주의자를 자처했으나, 결국 일제 말 극단적 공포 앞에서 자신의 현실 인식까지 왜곡하게 되었고, 이것이 과오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윤치호와 다른 사람들의 선택, 그리고 그에 대한 역사의 준엄한 평가는 100년 후를 사는 우리에게 올바른 선택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용기를 요구하는 행위인지 시사하고 있다. 충분한 고민, 그 고민을 실천하는 옳은 일을 행하는 용기. 이념이 부재한 방황의 시대를 헤쳐 나갈 소중한 실마리를 찾은 셈이다.

 

조선사람 하에서건 혹은 외국의지배 하에서건 조선에는 철도와 증기선과 우편시설과 전보가 들어서고 그것들이 조선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켜 서기 2000년의 조선은 지금의 조선과 비교할 때 새로운 창조물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 초가집들은 벽돌집이 되어 있을 것이고, 나무 한그루 없는 이 헐벗은 산천은 아름다운 꽃과 나무로 덮여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고통을 감내해온 수백만 조선 사람들은 더 이상 궁궐에 떼지어 몰려있는 점쟁이들, 내시들, 관상쟁이들을 보조해 주기 위하여 착취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의한 대로 세금을 내고 도로와 학교와 국방을 효율적으로 유지할 것이다. 때때로 나는 300년 후에 다시 찾아와 조선이 겪었을 변화를 보고 싶다. - 1900년 12월 30일 일기


 윤치호는 일기(1900/12/30)에서 2000년의 조선을 그리며, 300년 후 조선의 변화한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2000년 하고도 13년이 더 지난 지금, 그가 현재의 한국에 온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에 만족할까.

 

 

 

 

 

 

 


 

 

 

 의경 독후감 대회에 냈던 글인데 결과는 당연히 광탈. 이런 것 말고 좀, 그러니까 나처럼 지나치게 사색적이고 아주 약간 운동권의 내음을 풍기는 것 말고, 밝고 그런 걸 썼어야 하는데 싶어요. 무엇보다 분량 제한이 있다고 분량을 억지로 줄였는데, 너무 줄인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냥 적당히 긴 분량으로 쓸 걸 하는 생각. 나의 생각은 이 때와 그렇게 달라진 건 없음.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 10점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엮음/산처럼

 

윤치호의 협력일기 - 8점
박지향 지음/이숲





이상이라는 신화에 대한 또다른 '원본'

김연수, 『꾿빠이, 이상』


I. 이상 신화, 그리고 김연수


 이상. 한국 문학사를 풍미한 천재 시인. 드라마틱한 삶과 난해한 작품들로 그는 한국 문학계의 하나의 신화로 자리잡았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감수성을 자극했다.


 나도 어린 시절 이상에 매료되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오감도」연작,「이상한 가역반응」 같은 난해한 시들을 이해도 못한 채 읽고 또 읽으면서, 요즘 '중2병'이라 불리는 증상을 보이지 않았던가 싶다. 이상 전집을 샀는데 시·수필 편이 파본이라 반품하러 갔던 것도 기억난다. 이상 전집 소설 편은 그래서 중학교 때 딱 한 번 읽어봤는데 이해할 수 있었던 작품은 날개 뿐이었다. 그 뒤 대학 다닐 때 자취방에도 꽂아두었지만, 다시 읽어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문학적인 사람은 아니라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이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숭배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적지 않은 일반인들은 그랬을 것 같다. 아니면 나의 바람일지도. 그렇지만 이상으 '천재'이지 '정신병자'는 아니라는 평가에 대다수가 수긍하는 것으로 볼 때 사실일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나는 이상이 천재라고 여전히 생각하지만, 이러한 지배적 관념은 어디서 형성될 것일까? 이상의 삶에는 하나의 영웅담이 녹아 있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엄청난 수재로 지금의 서울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인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입학 졸업, 총독부에서 일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문학과 기생 금홍과의 사랑 때문에 이를 그만두고 다방을 차렸다가 망하는 이야기. 자신의 무기력함에 대해 갈등하다가 원대한 포부를 안고 도쿄로 건너가지만 (당시 조선인들에 만연한) 가난과 일본의 탄압 때문에 폐병으로 숨을 거두고 만 이야기가 그 영웅담이다. 「꾿빠이, 이상」의 저자 김연수는 이를 두고 '이상수난곡'이라고 소설에서 쓴다. 이상이라는 한국문학사의 예수는 죽은 지 한 달만에 동료 작가평론가들에 의해 되살아났던 것이다.


 김연수의 소설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주변 사람들로부터 김연수가 최근 한국 문학계의 '아이돌'이며 '슈퍼스타'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왔다. 그런 그가 이상을 '정신병자'라 생각해서 이 작품을 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작품을 쓸 필요 없이, 고은이 「이상 평전「에서 이상을 비난했던 견해에 동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지만 김연수는 책을 통해 이상의 인생과 문학의 '신화성'을 드러내면서도, 이상의 삶에 또다른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연구와 조사로 탄탄하게 받침되는 줄거리 내에서, 지속적으로 '진본'과 '위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II. 책의 구성과 줄거리


「꾿빠이, 이상」은 총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목차를 봤을 때는 '김연수 장편소설'이 아니라 '김연수 소설집'인가 했다. 그렇지만 세 이야기는 모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첫 이야기 '데드마스크'는 이상의 데드마스크 대한 이야기이다. 이상이 죽으면서 떴던 데드마스크는 지금 전해오지 않는데,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을 잡지사의 김연화 기자가 접촉하면서 겪는 이야기이다. 김연화 기자는 자꾸 자신을 '김연'기자로 호칭하는 전화들을 받고, 이상의 데드마스크라는 소재에 끌려 이를 취재한다. 또한 그는 평생 이상을 추종했던 서혁민이라는 사람이 남긴 유고와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를 넘겨받는다. 그는 무엇인가에 이끌려 이상의 데드마스크의 발견 소식을 발표하지만, 접촉한 업자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최 교수라는 사람도 가짜로 밝혀지자 검찰의 조사를 받기에 이르러 잡지사를 퇴사하게 된다. 첫 이야기에서 김연화 기자는 줄곧 '진짜'와 '가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피력하는데, 이는 세번째 이야기의 단초가 된다.


 두번째 이야기 '잃어버린 꽃'은 평생 이상을 추종해온 이상 연구가 서혁민에 관한 이야기이다. 평생 이상을 좇아왔지만 그는 이상이 아니라 서혁민이었기 때문에 사회에서 대접받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인사동에서 이상에 관한 책을 수집하던 그는 이상의 미발표 시 소설을 가지고 있다는 일본인 와타나베의 말을 듣고 일본으로 향하지만, 와타나베는 그에게 자신은 이상의 원고들을 태워버렸다고 한다. 평생 천재로 산 이상이 그 스스로 천재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얘기였기 때문에, 이상의 문학세계를 지키기 위해 이를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처음에 분노하던 서혁민은 와타나베의 말이 옳음을 깨닫고, 이상이 죽은 동경대학병원에서 음독자살하며, 자신이 쓴 '오감도 시 제 16호 실화'를 남긴다


 세번째 이야기 '새'는 교포 학자 피터 주의 이야기이다. 그는 한국인 부모 아래에서 자라면서 '오감도 시 제2호'를 접하고, 자신의 뿌리를 알기 위해 한국 현대문학을 전공으로 택한다. 그러나 그는 '출생증명서'가 아닌 '입양신고서'를 가져오라는 공무원의 말에 자신이 한국계가 아니라 사실은 대만 여성의 아들이었다는것을 알게 된다. 그는 한국에 건너와 오감도 연작시의 미발표시의 내용을 추정하는 논문을 발표하지만, 권민희 교수가 오감도 시 제 16호 실화를 입수했다며 이를 발표하자 망연자실한다. 이 때 첫번째 이야기에서 등장한 김연화 기자가 피터 주에게 서혁민의 원고를 넘겨준다. 문제는 서혁민의 원고의 시가 가짜 데드마스크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피터 주 스스로 예전 자신의 논문을 뒤엎으면 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오감도 시 제 16호 실화'를 발표하지만, 이는 오감도에 등장했던 단어들을 빈도수에 따라 끼워맞추기 한 것이란 다른 학자의 지적을 받고 그는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투신 후 3m 떨어진 다른 층 옥상에 떨어진 그는, 권민희 교수 발표의 모순과 자신의 중국 태생을 모두 묻어버리고 한국인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이상


III. '진본'과 '위본'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가 바로 진짜와 가짜의 문제이다. 책 내내 이상의 데드마스크와 오감도 시 제 16호 실화의 진위여부가 문제가 된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김연화 기자는 자신이 김연 기자인 것처럼 행동하고, 자신이 불륜 상대인 정희를 사랑하는지 모르겠다고 되뇐다. 두번째 이야기의 서혁민은 그야말로 가짜 이상이다. 그의 삶 자체가 가짜 이상이었다. 세번째 이야기의 피터 주는 한국계가 아니라 중국계이지만 한국계로 살아왔으니 그의 삶도 가짜이다. 이처럼 가짜 삶을 사는사람들을 두고 데드마스크와 시의 진위여부를 다루며,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다소 포스트모던적 표현의 과잉이 있는 것 같은 책 말미의 평론을 참고해서 내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면 이렇다. 이상이 '미친놈의 개수작'이 아니라 천재로 남은 이유는, 50%가 넘는 사람들이 이상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즉 진본과 위본의 경계는 언제나 유동적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진짜일지 가짜일지는 유동적이며, 다수의 의견에 좌우되며, 때로는, 우리가 우리 삶의 진위 여부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연화 기자는 김연 기자로 행동하기를 택했다. 서혁민은 이상의 삶을 좇는 데 자신의 삶을 바침으로써 가짜 이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를 남김으로써 진짜 서혁민이 되었다. 피터 주는 자신의 출생증명서를 불태움으로써 가짜 한국인이 아닌 진짜 한국인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한편 이는 이상에게도 적용된다. 책에서 이상은 본명인 김해경과 책 속의 인물인 이상이라는 두 개의 인격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상의 미발표작으로 작중에 등장하는 소설 '백병'에서, 작중의 이상은 김해경을 죽인다. 즉 이상은 죽음을 통해 가짜 김해경이 아니라 진짜 이상으로 영원히 남게 된 것이다.


 

IV. 맺으며


 고은은 '이상 평전'에서, 나이 들어서까지 이상을 연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이상을 평가절하했다. 김연수가 이 책에서 70대의 서혁민을 등장시킨 것은 어느 정도는 이 주장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을 것 같다. 고은의 생각에는 현실에 관여하지 않고 '예술을 위한 예술'이니 하며 난해시를 남긴 이상은 '가짜'였던 것이고, 김연수에게는 '진짜'였던 것이다.


 사실 책에 등장하는 진위의 문제를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 하나는 데드마스크와 이상의 시 등에서 보이듯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진위여부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가 스스로 결정하는 자기 삶의 진위여부이다. 고은과 김연수의 시각 차이는 전자의 것이다. 이와 별개로 이상은 스스로 자신을 진짜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상이 만약 '미친놈'으로 평가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후자이다. 즉 절대적 기준이 업는 시대에 스스로 실존을 성취한 '진짜 나'로서 사는 것이다. 가짜 이상이었지만 스스로 이상을 추구해 일생을 바친 서혁민은 행복하게 눈을 감았지만, 모두 한국인이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음을 스스로 알았던 피터 주가 출생서류를 불태우기 전까지 자괴감에 시달렸던 것처럼. 누군가의 모조나 복제일지라도, 아니면 근본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그 스스로의 유일한 삶을 살 수 있다. 소설 속 인물들처럼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진짜'로 살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을 진짜로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


 외박 때 이상 소설 전집이나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그 이상의 소설들이 원본이듯, 꾿빠이 이상도 이상에 관한 또 하나의 원본임을 음미하면서.







덧붙이는 말


작년 10월 중순경에 썼던 독후감. 이상에 관한 책을 읽었다고 쓸 때 이상에 휘둘리기라도 했는지, 지금 읽어보니 서평이 난잡하다. 게다가 이 책, 품절됐다고 한다. 나름 문학상도 받았고, 그 뿐만 아니라 정말 재밌고 대단한데, 이런 책이 품절됐다는 게 우리 출판계의 현주소인 것 같아 많이, 정말 많이 씁쓸하다.


꾿빠이, 이상 - 10점
김연수 지음/문학동네







네 폭의 그림으로 부활한 탄청 현

왕여인의 죽음을 읽고


※ 이 포스트는 제가 2011년 1학기에 '동아시아문화의 성립과 발전' 수업 기말과제로 제출한 레포트입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대체로 지배층의 역사이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지배층, 그 중에서도 왕이나 일부의 이름난 사람들의 경우만 이름을 올리고 있다. 국사책에 이름을 올린 피지배층이라고 하면 만적이나 임꺽정처럼, 반역을 일으켰거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경우일 텐데, 이 경우도 결국 이들은 평범한 피지배층, 즉 민중의 모습을 반영하지는 못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결국 교과서에서민중에 대한 묘사는 사회∙경제사의 일부 서술에 국한된다.


그러나 이는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 중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피지배층에 대해 과도하게 적은 비중만을 할당하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많은 비판들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비판은 역사가 오래되진 않았지만, 아주 새로운 비판은 아니다.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1935년에 쓴 시 「한 읽는 노동자로부터의 질문들(Questions from a worker who reads)」에서 어린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였는가?’라며 문제 의식을 노골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그렇기에 비록 조너선 스펜스의 저서인 『왕 여인의 죽음』은 민중의 역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이례적이지만, 매우 특별한 책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단순히 민중을 조망했다는 것을 넘어서, 세 명의 관찰자와 함께한 서술이라거나, 중간중간에 삽입된 환상적 이야기 등 문학적 수사와 잘 짜인 구성을 통해 탄청(郯城) 현을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에 생명을 부여하고, 덧붙여 지나친 전체사 추구를 피함으로써 아날 학파와도 다른, 그 자신의 미시사적인 독특한 위치를 획득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까를로 진즈부르그의『치즈와 구더기』의 사례와는 달리, 역사 탐구에서 미시사적 직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왕 여인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여러 미시적 사료들을 섭렵하는 전통적 방법의 도움을 받아 짐작컨대 청나라에는 왕 여인과 비슷한 여인들이 적지 아니 있었을 것 같고, 탄청 현과 같은 다른 수많은 현들이 존재했을 것 같다.’는 당시의 조망을 제시하고 있다.


 『왕 여인의 죽음』


탄청을 기록한 세 명의 관찰자

 

이 책은 총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중 첫번째 장은 이 책의 사료를 제공해 준 세 명의 관찰자에 대한 장이며, 나머지 네 개의 장은 이 세 명의 관찰자와 스펜스가 함께 그린 탄청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관찰자인 빙가참, 황육홍, 포송령은 모두 신사(紳士)층에 속하는 사람들이긴 했지만, 각자 다른 시각과 경험, 표현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칫 단지 사료 제공자의 위치로 격하될 수 있었던 이들을 저자는 자신의 서술의 동반자로 격상시킨다. 많은 경우에 스펜스의 서술은 서술자의 이름이나 그 저술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렇기에 독자는 서술자로서 저자인 스펜스 뿐 아니라 빙가참, 황육홍, 포송령을 받아들이고, 친근하고 가까이 느끼게 될 뿐 아니라, 당시의 중국을 살아가던 사람들인 그들이 되어 직접 사건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어 책에의 몰입을 강화한다.


이 세 명의 관찰자는 각기 다른 역할을 담당한다. 빙가참은 거의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현지』를 통해 탄청의 분위기를 꾸밈없는 말로 묘사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배경 서술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지의 서술만을 통해서는 잘 알 수 없는 빙가참의 매력은, 1장에서 드러나듯이 그가 삼번의 난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그 뒤의 그는 젊었을 때, 그가 몹시 좋아하던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이 반역을 일으킨 영왕 린의 밑에서 시를 썼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의 시를 더 이상 읽기를 거부했던 일이 있었다.’라는 문장은 이러한 매력을 극대화한다. 그는 비록 청나라에 정복된지 얼마 되지 않은 한족이었지만, 동시에 그에게 진사 학위를 주었고 그가 지사로서 섬겼던 나라를 배신할 수 없었던 진정한 사대부였던 것이다비록 그는 황육홍과 포송령에 비해 개성은 떨어지지만, 그의 『현지』에서의 서술을 볼 때마다, 우리는 관직을 잃은 상태였음에도 나라에 충성하고자 했던 빙가참의 면모를 생각하게 된다.


황육홍은 빙가참이 지사 직을 부임 2년 만에 잃은 1670, 탄청의 지사에 부임한 사람이다. 그는 빙가참과 마찬가지로 탄청의 지사로서 열심히 일하였고, 회고록을 남겼다. 이는 지사로서 후임 지사들에게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하는 지침서로서의 역할도 겸했다. 황육홍은 유능했고, 민중들을 사랑했던 것 같다. 성황신에게 메뚜기의 화를 막아 달라는 제사를 지낸다거나, 왕 산 도적단의 소탕, 왕 여인 살해 사건의 해결 과정 등에서 그런 모습을 알 수 있다. 특히 후기로 첨부되어 있는 재판 과정에서는 탐정처럼 직접 사건을 수사하며 추리 소설과 같은 흥미진진함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황육홍도 탈세를 단속하는 데에서는 실패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황육홍의 모습은 전근대 중국의 관리들에 대해 우리가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고뇌에 동감할 수 있게 하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편견은 자연스럽게 무너진다.


포송령은 위의 두 명과는 다른 배경을 가진 인물이다. 지사를 역임한 두 명과는 달리, 포송령은 진사 학위를 얻은 후에 숱하게 시험을 치렀으나 거인(擧人)의 지위에 이르지 못했고, 71세가 되어서야 하급 벼슬을 받았을 뿐이다.이런 배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가 저술한 『요재지이』를 통해 서술의 전면에 나타나는 그는 당시 중국인의 삶, 그리고 고독과 관능과 꿈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의 책에는 빙가참과 황육홍은 다루지 않은 성(), 반체제적 인물, 힘들었던 과부들의 삶에 대한 환상적인 이야기가 나와 있다. 그는 비록 전근대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수사도 뛰어나,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의 이야기가 전기(傳奇)성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늙은 노파와 젊은 여자의 이야기처럼 풍자와 함께 섬뜩한 공포를 주는 이야기도 있고, 추이 멍의 이야기처럼 전기성을 배제하면서도 잘 쓰여진 이야기도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면서 빙가참과 황육홍의 서술의 빈자리를 메우며 독자를 책 속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스펜스와 포송령의 합작의 절정은 왕 여인이 죽기 바로 전 잠에 빠져 들어갈 때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에 대해 상상일종의 몽타주 부분에서 극대화된다. 저자는 이 세 서술자들을 통해, 즉 빙가참이 제공하는 ‘배경’과 황육홍이 제공하는 ‘현실’, 포송령이 제공하는 ‘꿈’을 합쳐 ‘탄청 현’을 ‘토지’, ‘과부’, ‘분쟁’, ‘가출한 여인’이라는 주제를 가진 네 폭의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조너선 D. 스펜스 (Jonathan D. Spence)



네 개의 위기에 나타난 구성

 

스펜스가 그린 그림들은 기본적으로 화려하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재난으로 고통받아 왔으며 1668년에 지진으로 폐허가 되기도 한 탄청은 그림의 매력적인 배경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배경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거창한 것이 아닌 작은 위기들이다. 그러나 저자는 위기들을 작은이야기라고 부르는 것은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바라보고 하는 말이지 실제로 이 사건들에 연루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사건들은 절대적이며 치명적인 위기였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특별하지 않았던 네 개의 위기는 스펜스의 책을 통해 특별해진 것이다.


한편 네 이야기의 구성은 비슷한 모습을 보이지만, 획일적이지는 않다. 첫 번째 이야기라 할 수 있는, 큰 눈이 내린 이야기로 시작하는, 경제적 어려움을 다룬 제2토지에서, 저자는 빙가참과황육홍, 포송령의 자료를 활용하여 탄청이라는 현을 설명하는 데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탄청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경제적 어려움은 여러 자료와 묘사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포송령의 이야기 중 경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등장 인물인 샤오어가 등장하는 이야기 이후, 황육홍(또는 두 읍장)이 현실에서 맞닥뜨렸던체납을 상대로 한 위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다음의 이야기인 제3과부부터『현지』 또는 배경 설명의 비중은 줄어든다. 물론 여러 과부의 이야기를 싣고 있으나, 이들을 다 합쳐도 포송령의 현명한 과부 시리우의 이야기하나보다도 비중이 낮다. 그리고 그 뒤에는 당시 탄청에서 벌어졌던(그리고 아마 황육홍이 처리했으리라 생각되는)펑여인이 겪은 위기가 등장한다. 이는 계속 이어져 분쟁의 경우 포송령의 추이 멍의 이야기와 황육홍이 왕 산 도적단을 소탕하는 내용이 한 장의 거의 전부를 차지할 정도이다. 5가출한 여인의 경우 포송령의 이야기가 여러 가지로 늘어나 비중이 높아졌고 황육홍의 비중이 후기로 옮아가긴 했으나, 구성 자체는 비슷하다.


이는 즉, 저자가 독자들에게 제1장과 제2장 초반의 설명들을 통해 탄청이라는 무대를 독자들에게 각인시키고, 이후에는 그 무대 위의 배우들만 교체함으로써 탄청의 여러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당연히 제3장부터의 배경 설명은 그 분야에 대한 설명에만 국한되지만, 제1장과 제2장 초반의 설명은 포괄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이렇게 설정된 무대에, 저자는 포송령의 ‘꿈’과 황육홍의 ‘현실’을 번갈아 올리며 당시의 탄청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만 간혹 포송령의 이야기가 너무 길거나 자주 나오는 부분에서는오히려 포송령의 이야기가 그 장의 핵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제3장의 시리우의 이야기가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비록 저자가 장의 가장 앞에 곧 다루어질 펑 여인의 이야기를 짧게 언급해 놓고는 있으나, 포송령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앞의 짧은 언급은 머리에 잘 남지 않는다. 그리하여 죽은 남편의 탐욕스런 친척들에게 용감하게 맞섰지만 아들을 잃은 비극적인, 그러나 비교적 평범한 펑 여인의 이야기는 조명을 덜 받게 된다. 이것이 스펜스의 단순한 실수인지, 아니면 당시 과부들의 경제적 문제로 인한 압박을 오히려 강조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후자라면 소기의 성과를 획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대청률례』의 부작용으로 인한 과부에 대한 압력이 현존하는 당시의 탄청을 생각했을 때, 돈이 문제의 핵심이 되지 않는 시리우의 이야기는 당시 중국인들의 꿈을 반영한 것일 것이다. 그에 비해 펑여인의 이야기는 중국인들의 현실이었고, 이 둘은 스펜스의 구성을 통해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펑 여인의 비극을 독자의 기억 속에 남기고 있다.

 


역사 서술의 새로운 지평

 

그러나 단지 개성있는 세 서술자를 통한 묘사, 또는 구성의 탁월함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는 『왕 여인의 죽음』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책의 이러한 성과는 결국 역사 서술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다. 『왕 여인의 죽음』은 미시사로서, 또한 문학에 가까운 역사서로서 기존의 역사 서술과 차별되는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미시사로서의 『왕 여인의 죽음』

 

이 책은 민중의 삶을 미시사적 서술 방식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탄청의 5년에는 중국 전체적으로 봤을 때 큰 영향을 끼칠 만한 사건은 없었다. 그렇지만 저자는 탄청에 애정을 쏟으며, 보통 사람들을 행동하는 인간으로, 역사의 주체로 서술의 중심에 끌어들인다. 비록 저자가 빙가참, 황육홍, 포송령의 붓을 빌려 탄청을 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스펜스가 묘사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펑 여인이나 관 밍유, 왕 여인과 같은 보통 사람들이었다. 또한 넓게 본다면, 관직에서 쫓겨나 산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던 빙가참이나, 늙어서야 벼슬을 얻을 수 있었던 포송령 모두 대단한 사람이 아닌 일반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민중의 역사를 다룬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미시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생활사이다. 우리나라에서 기존에는 정치사나 기껏해야 경제사 정도의 책만이 출판되었지만, 최근 생활사 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생활사는 이 책처럼 꼼꼼한 사료와 치밀한 구성으로 당대를 복원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서술에만 그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다는 식의 서술은 미시사적 접근과는 거리가 멀며, 단지 하나의 부문사일 뿐이다. 그렇다면 미시사의 기준은 무엇이며, 『왕 여인의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미시사인가?


독일의 역사학자인 위르겐 슐룸봄은 서술 대상의 규모를 기준으로만 미시/거시를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미시사가 강조하는 것은,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세밀하게 관찰하되 그 연구 대상의 범위를 넓게 잡는 것이다.’라고 했고, 또한 더욱 중요한 사실은, 미시사의 연구 중점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을 행동하는 인간, 즉 자기들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으로서 이해하려는 데 있었다.’라고 했다. 즉 미시사에서 민중은 통계 숫자나 평균치가 아닌 각각의 인간으로 파악되는 것이다미시사라는 말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러한 의미의 미시사는 70년대 후반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왕 여인의 죽음』은 미시사의 초창기적 작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왕 여인의 죽음』은 이러한 의미에서 미시사이다. 저자는 탄청 현이라는 넓은 세계에 대한 관찰을, 왕씨네가 리의 모욕에 대한 보복을 의논하던 1670 7 6일이 우연의 일치로 첸 구오샹이 첸 리엔을 탄청 시 변두리에서 쳐죽인 바로 그날인 것까지 알아차릴 정도로 세밀하게 관찰했으며,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을 행동하는 인간으로 이해했음은 이미 위에서 계속해서 밝혀 왔다. 또한 반대로, 미시사적 서술이 『왕 여인의 죽음』과 같은 책을 쓰는 데에 필수적이라는 사실도 드러난다. 왕 여인이나 펑 여인, 다른 민중들이 그저 익명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면, 우리가 『왕 여인의 죽음』을 읽는 행위는 단순히 청대의 공문서를 뒤져보는 것 이상의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못할 것이다.

 

역사와 문학의 경계의 해체

 

『왕 여인의 죽음』은 보기만 해도 일반적인 역사서와 다르다. 누구나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소설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물론 모든 서술은 사료에 충실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전체적인 서술의 문체는 소설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물론 소설이라면너무나도 늦은 왕 여인의 등장 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있었을 듯도 하다.


역사와 문학의 경계를 위협하는문학 분야의 시도는 시오노 나나미의『로마인 이야기』가 단연 유명하다. 『로마인 이야기』는 명백히 역사학자가 아니라 작가가 쓴 문학 내지 에세이이며, 서술에 허구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지나친 편애, 이념적 편향 등이 드러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를 역사서로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역사에 흥미를 처음 부여하는 용도로는 『로마인 이야기』는 훌륭한 저서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을 역사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문제는 더욱 커지게 된다.


그렇다면 『로마인 이야기』처럼 흡인력 있는 역사서를 만들면 어떨까?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마치 문학을 읽듯이 역사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펜스의 『왕 여인의 죽음』은 바로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책이다. 역사를 역사이되 문학처럼 쓰기, 그러므로 정확성재미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책이 된 것이다. 조너선 스펜스의 다른 대표작들도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으나, 비슷한 서술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면,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된다. 『왕 여인의 죽음』은 역사와 문학의 높은 경계를 긍정적으로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3년이나 지난 지금 읽으니, 여러 모로 정말 미숙했구나 싶기도 한데, 한 편으로는 정말 그 때 열심히 머리 싸 매서 쓰긴 썼구나...라는 생각도 들고, 그 때보다 지금 퇴화한 것도 많은 것 같아요. 복학해서 더 열심히 해야 할 텐데.


이 이후에 조너선 스펜스의 책을 하나도 안 읽었는데, 얼마 전 한국일보 책 란에서 또 그 이름을 봤었습니다. 계속 안 읽기에는 너무 아쉬우니 꼭 시간 내서 읽어봐야겠어요. 


왕 여인의 죽음 - 10점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이재정 옮김/이산






11월 초에, 한국일보 리뷰 보고 읽었던 책.


아프리카 대륙의 형성부터 인류의 진화, 이후 현대사까지 정말 말 그대로 '일대기'를 서술한 책인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지질이나 식생 같은 경우 나의 지식이 일천하여 읽는 데 진도도 오래 걸리고 그랬지만 고대 문명 성립 이후로는 꽤 속도가 나긴 했다. 생태적 조건들과 여러 내부적 외부적 동력들을 위주로 아프리카 역사를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서술의 특징이라면 최고대부터 현대까지 (에티오피아의 악숨을 제외하면) 말리나 송가이 같은 전통적인 왕조들의 역사라거나 그런 건 별로 언급되지 않고 철저히 기후나 기술, 유럽 또는 아라비아와의 무역 같은 하부구조나 일반 사회 구조 같은 것들 위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 


사실 근대 이전의 아프리카 역사와 부족 또는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보면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어제까지의 세계'와 비교도 좀 되었다. 다이아몬드의 책은 정말 광속으로 읽히긴 했다. 기본적으로 전통 사회와 현대 사회의 다른 해결방식들을 위주로 고찰한 것인데 일화들 위주로 서술이 이루어져서 정말 푹 빠져서 후딱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근데 서술을 좀 무리하게 아무튼 현대 사회에 대한 교훈을 이끌어내려고 그런 식이었어서 약간 용두사미라는 느낌이 나긴 했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함의하는 식으로 나갔으면 좋았을 것 같다.) 반면 이 책은 짧게 짧게 국면마다 전체적 배경이나 대표적 사건을 위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어서 진도는 정말 안 나가지만 정말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를 읽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뭔가 여기서 연대기 같은 긴 책 읽으면 시간 너무 많이 먹을까봐 자치통감이나 로마제국쇠망사 이런 것들 안 읽었는데 이 책을 읽고 있는 걸 보면 그냥 어차피 안 할 영어 공부 포기하고 엄청 긴 책들이나 읽어봐야겠다 ... ㅎ.ㅎ.ㅎ. 이러고 요즘은 텝스때문에 독서는 뒷전 ㅠㅠ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 10점
존 리더 지음, 남경태 옮김, 김광수 감수/휴머니스트






 

 

 

1월이 아직 하루 한나절이 남았지만 그 동안 책 한 권을 다 읽을 것 같지는 않으니, 올려 보는 1월에 읽은 책들.

1. 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소설)
2. Franz Kafka, 전영애 옮김, 『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소설집)
3.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소설)
4. 한강, 『채식주의자』, 창비 (연작소설)
5. 김연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문학동네 (소설집)
6. 이덕무, 권정원 옮김, 『책에 미친 바보』, 미다스북스 (수필집)
7.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문학동네 (소설)
8. Joseph Conrad, 이상옥 옮김, 『암흑의 핵심』, 민음사 (소설)
9. 파울로 코엘료, 공보경 옮김,『아크라 문서』, 문학동네 (소설)
10. 김연수, 『밤은 노래한다』, 문학과지성사 (소설)

총 10권이니 3일에 한 권씩 읽은 셈이다. 12월에 비해서, 12월에 한 결심에 따라 정말 많이 줄이긴 했다. 그렇다고 독서량을 줄인 만큼 다른 일들을 했다 뭐 이런 것은 전혀 없긴 하지만. 

1.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번 달 읽은 최고의 책은 '채식주의자' 였을 것이다. 그만큼 두 책 모두 굉장히 좋았다. 그런데 '밤은 노래한다'의 경우 몇 년 전에 읽었던 책인데, 그 때는 별 느낌이 없었다는 거. 그 때 내가 일부러 집중하지 않았나, 아니면 집중했더라도 별 느낌을 못 받았었나, 별 인상을 못 받았던 책이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정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한 줄 한 줄을 읽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2. '채식주의자'는 너무 강렬하다. 내가 읽은 한강의 첫 소설인데 김연수 소설에서 맨날 봤던 '세계의 붕괴'나 '취약성' 이런 것들을 다루고 있는데도,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세계의 붕괴를 무채색이 아니라 강렬한 이미지, 색과 빛과 형상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에 나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3. 이덕무의 책을 읽고 느낀 점은, 정말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구나, 그런데 뭐 그 이상의 느낌, 그러니까 그 시대에 돋움새김된 마냥, 도드라진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성리학적 도학자의 느낌이 강하달까. 책을 읽는 것은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 읽고 나면 그 이상의 경지는 비판적이고 치밀한 사유, 그리고 어느 정도의 재능 ...^^;;이 없으면 도달할 수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이덕무의 산문들은, 뭐라 해야 할지, 인상적인 내용이 너무 없었다. 과거에는 글을 배우고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높은 수준의 활동이었고, 일반적인 글에도 아우라가 있었으니 이런 글들이 전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아니면 그냥 내가 아직 학문의 수준이 미천해서 이덕무의 뜻을 못 느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4.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사실 앞부분에 흩뿌린 단서들이 약간 비겁하다는 생각이 드는 반전이긴 했지만, 충분히 재밌고 충격적인 소설이었다. 김영하의 대표작이라는 '검은 꽃'이나 '빛의 제국'도 반드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

5.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모두 재밌었지만, '산책하는 사람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이 이상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문학작품인지는 나의 문학적 소양이 일천하여 느끼지 못하였다. 한강의 '몽고 반점'을 읽었을 때는 바로 느낌이 확 왔는데, 끙 ^^ 작년엔 김애란, 올해는 편혜영이 이상문학상을 받았다는데, 그 소설들을 읽으면 어떤 느낌이 올까.

6. 마지막으로 파울로 코엘료의 아크라 문서. 저번에도 결심했지만 지키지 못한 거. 앞으로도 파울로 코엘료 소설은 안 읽어야겠다.



밤은 노래한다 - 10점
김연수 지음/문학과지성사








김연수의 1997년작『7번국도』를 읽었다. 13년 뒤에 다시 쓴『7번국도 Revisited』와는 비슷한데도 다른 느낌이었는데, 시간에 쫓기듯이, 그리고 익숙해서 막 넘기면서 읽느라 제대로 못 느낀 것 같다.

7번국도 Revisited의 메인 주제는 기억과 망각이었던 것 같은데, 7번국도의 주제는 그에 분노와, 더욱더 진해진(진했었던) 허무함이 더해져 있는 것 같다. 마치 요즘 일베 글들같이 (용법은 다르지만) '민주화'라는 단어가 이탤릭체로 강조되어서 조롱의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데, 민주화 이후 우리 세대가 놓인, 이념적이거나 종교적이기까지 했던 희망찬 미래상을 상실한 상황, 그렇지만 윗 세대는 그런 절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을 풍자한 듯하다. 낙원은 가짜 낙원이고, 우리를 대신할 놈들은 세상에널려 있다. 아버지 세대들이 만든 것은 미래가 아닌 과거일 뿐이고, 우리에겐 다른 맥락과 방법이 있다. Revisited에서는 없어진 자주 등장하는 성 묘사나, '나' 또는 재현의 어두운 뒷이야기들도 그렇고, 그 외에도... 일단 다시 읽어봐야지. 

어쨌든 나에겐 Revisited 버젼이 마음에 드는데, 거의 40이 된 작가가 그나마 좀 더 원숙한 눈길로 청춘을 바라보고 있어서, 청춘의 짧음과 불완전함, 절망이 덜 드러나는 것 같고, 조금은 더 친절하고 따뜻한 눈길로 청춘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책에서 말하듯이 스무 살이라는 나이는, 너무나도 눈부셔서, 그 때의 일들은 나이 자체가 발하는 광채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스무 살을 제대로 보려면, 적어도 스무 살은 더 먹고 뒤돌아 봐야 하는 걸까.

그리고 갑자기 몇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1. 김연수 작가도 어쨌든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비교적 어린 시절에는 지금보다는 미적으로나 뭐 조금 불완전한 문장들을 구사했다는 것이 김연수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레 생겼던 약간의 열등감 같은 게 아주 약간 해소되었다는 것. 2. 그리고 너무 급하게 소설을 읽고 나서 드는 찜찜한 같은 걸 느끼면서, 아무래도 교양서가 아니라 소설이야말로 여유 시간이 많이 남고 넉넉할 때 생각하면서 천천히 읽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3. 아무래도 이제 잠시 현대 소설 읽기를 쉴 때가 된 것 같으니 이미 대출한 것들만 읽고 잠시 그만 읽어야겠다는 생각. 마지막으로 4. 인생에 마법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참 많구나 하는 것. 이제 겨울인데 또 한 번의 겨울 마법이 오려나.

소설을 한 번 읽고 그 소설의 다른 버젼까지 읽었지만, 나는 아직 희망은 기억에 있는 지, 망각에 있는 지 모르겠다. 기억들을 학살하는 망각에 맞서는 것이 희망인지, 아니면 모든 기억하는 사람들이 사라진 후 나의 과거에 평화가 찾아오게 하는 것이 희망일지. 희망이란 둘 다에 있을 지도 모르고, 둘 중 어디에도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다음 휴무 때 다른 생각일랑 안 하고 천천히 읽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난 찜찜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거다. 그리고 정기휴가는 웬지 3월인 것 같으니 나도 자전거여행!이나 가볼까.

마지막으로 7번국도에는 있는데 Revisited에는 없었던 것 같은 인상적이었던 구절.

결국 우리는 누구도 영원히 기억할 수는 없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은, 그러니까 영원히 기억할 수 없는 그 사람을 별들의 무리 속으로 보내어 그 별들의 무리 안에서 우리가 영원히 기억하지 않아도 외롭지 않게 만들려는 생각의 소산일 것이다. - 196p


7번국도 Revisited - 10점
김연수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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