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시대의 재조명』을 다 읽었다. 읽고 난 느낌은 뭐랄까, 주모 국뽕 다섯사발만 더 주소 해서 다섯사발 들이킨 느낌. 다만 뽕답게 끝맛이 쓰고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이태진 교수님의 연구를 뽕으로 비유하면 안 되겠지만, 1902~1903년간에 무기제조소를 만들고 징병제 실시를 예고하고 그랬던 것을 보니 좀 아쉽고 쓰라리다. 그랬으면 제대로 된 전쟁이라도 해봤을 텐데. 이외에도 재정적으로나 토지제도적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전근대적이라고 비판하겠지만 나름의 개혁을 했고, 무엇보다 몰랐던 서울 도시개조사업에 대해서 알게 되어서 좋았다. 독립협회 위주의 역사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봤고.

근데 우리나라가 아무리 개항이 1876년으로 늦었다고 해도 일본의 1863년보다 13년밖에 차이 안 나는데, 일본은 13년만에 운요호라는 배를 띄워 다른 나라를 함포로 개항시켰는데(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이태진 교수는 고종의 능동성을 강조하지만) 우리나라는 개항 13년 후인 1889년에 왜 아직 시골 구석을 벗어나지 못했을까 생각해 보면, 역시 청이라는 압력이 너무 강했다는 답변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일본은 전통적인 조공-책봉 질서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그 질서 안에 제대로 포함되어 있었고, 청의 속방화 정책에서 벗어나려고 열강들이랑 조약들 맺고 했지만 임오군란 이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으로 관세권을 뺏겨버렸으니 뭐 개혁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있나. 한성주보마저 돈 없어서 폐간되는 마당에. 그런 의미에서 청일전쟁으로 청의 영향력이 상실되고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상실된 대한제국기부터 비로소 제대로 된 (근대적이든 보수적이든) 개혁이 시작된 거고, 그래서 러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징병제 군대도 없었고 해군도 없었던 게 아닐까. 갑오개혁은 제도개혁에 국한되어 있었고, 제대로 된 산업진흥과 실질적 국력향상을 동반한 광무개혁은 8년밖에 안 했으니. 아무튼 원래 우리나라가 속해 있었던 외교질서의 제약이 너무 아쉬웠다. 고종이 얼마나 똑똑했어야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었을지 생각하니 괜히 숙연해진다.




고종시대의 재조명 - 10점
이태진 지음/태학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