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시대, 한 친일 지식인의 내면 읽기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윤치호 일기)를 읽고
 

 

1. 시작하며 - ‘힐링’ 열풍과 ‘이념의 부재’


 ‘힐링’ 열풍이 거세다. 젊은이들은 끊임없는 아픔을 토로하고, 이를 달래 주려는 ‘멘토’들도 끊임없이 넘쳐난다. 힐링 서적, 힐링 프로그램 등이 도처에 범람하는 풍경이 어느덧 우리 시대의 초상이 되었다.


 물론 젊은이들의 방황이 우리 시대에만 고유한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요즘만큼 심했던 적이 있었을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삶의 방향을 잃고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은 채 그저 살아가기에만 급급하다.


 나는 이런 현실이 ‘이념의 부재(不在)’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젊은이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개인의 삶을 국가적·민족적 규모에 통합시켰던 전통적 이념들이 있었다. 국가가 주도한 경제성장 신화와 대학가를 지배했던 민주화 투쟁 등이 바로 그런 이념들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젊은이들은 선진 경제나 민주사회 건설에, 또는 둘 다에 뛰어들어 청춘을 불살랐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우리 경제가 선진 수준에 접어들면서 전통적 이념들은 힘을 잃었고, 그 자리를 채운 소비문화는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지’ 지침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문제를 파악한다면, 오늘날 젊은이로서 방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힐링’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소에 이런 생각을 품고 있던 나에게 『물 수 없으면 짖지도 마라』(이하 ‘윤치호 일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 민족사 최대의 격변의 시대였던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그 시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민족 지도자였던 윤치호의 진솔한 생각들과 고민들이 글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일기 속의 그 역시 방황하는 한 사람이었고,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과 민족의 미래를 항상 고민했다. 비록 거의 100년 전의 일기였지만, 그의 일기를 읽으면서 때로는 그에 공감하고 때로는 안타까워하며, 그의 일기와 상상의 토론을 벌일 정도로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아직 나도 삶의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이 일기를 통해 더 깊은 고민의 재료와 삶의 실마리를 얻게 된 것 같다.
 

 

『윤치호 일기』  좌옹 윤치호

 

 


2. 윤치호의 삶과 ‘윤치호 일기’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는 19세기 후반에 중국, 일본, 미국에서 유학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의 의장을 거친 개화운동의 핵심 인물이며, 조선YMCA 회장으로서 기독교계의 최고 원로였다. 그러나 이처럼 다채로운 경력을 지닌 그는 105인 사건으로 일본 당국에 체포되었다 석방된 뒤 3·1 운동을 반대하는 등 소극적 친일로 돌아선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각종 친일 단체의 간부를 역임하는 등 완전히 친일 대열에 합류하여, 1945년에는 일본제국의회 칙선의원으로 선임될 정도로 친일파의 거두가 된다.


 그는 60여 년간 일기를 썼다. 보통 사람들은 한 달 계속 쓰기도 버거워하는 일기를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줄곧 썼다는 점에서 그의 남다른 면모가 보인다. 감리교 신자였던 그는 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항상 되돌아보고 반성하려 했다. 일기는 중간에 몇 번 끊기면서도 계속 지속되는데, 당대의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 소문들, 그리고 그에 대한 윤치호의 생각들이 상세히 쓰여 있다. 그런데 비밀을 지키고 싶어서였는지 일기의 대부분은 영어로 쓰여 있어, 지금까지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김상태가 편역한『물 수 없으면 짖지도 마라』는 이 중 1919~1943년 분량을 발췌·번역한 것이다. 이제 일기에 담긴 그의 생각을 따라가 보자.
 

 

영어로 쓰인 윤치호 일기

 


3. ‘윤치호 일기’에 나타난 그의 사상


 윤치호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생각했다. 열강들이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마음대로 침략하던 당시에 그의 생각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감리교 목사들이 아프리카에 선교사를 파견하면서도 정작 ‘미국에서 흑인들을 모두 쓸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것을 잊지 않는다. ‘인간에게 과학을 주면 독가스와 폭탄을, 인간에게 사회주의를 주면 볼셰비키 지옥을 만들 것’(1933/11/8)이라고 쓴 일기는 그의 생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따라서 그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3·1운동을 반대했다. 당시 민족 지도자들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에 심취하여 조선이 곧 독립될 것이라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조선 독립 문제가 파리 강화 회의에 상정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만세를 외쳐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민족은 없을 것(1919/3/2)’이라고 냉소적으로 평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과잉 진압으로 동포들이 겪는 고통에 분노하며 비통해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는 또한 일본이 조선을 오직 일본인의 이익만을 위해서 경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일본의 효율적 통치가 고종의 부패한 통치보다는 낫다고 보았다. 결국 그의 결론은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조선인들은 ‘이조 오백년간 배관열(拜官熱)만 발달’하여 호전성이 뿌리 뽑힌 민족으로, 정치적 담론에만 관심이 있을 뿐 실제 근대 국가를 운영할 상업·공업·행정·군사적 측면에서는 무능하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 ‘마사리크가 연설을 잘 해서’라고 믿는 우스운 사람들이 있다며, 이는 꾸준한 실력 양성 덕분이고, 조선인들도 독립을 이루려면 단기간에 근대화를 이뤄낸 일본인들에게 근대 문명을 배우면서 실력을 양성하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이 독립되지 못한다면, 일본이라는 대제국 내에서 ‘영국의 아일랜드가 아니라 영국의 스코틀랜드(1943/3/1)’처럼 다양성을 지니고 공존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우리 조선인이 아직 정치적 독립을 위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몇 가지 확실한 증거가 있다. (1) 일부 지역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조선이 독립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 잘못 안 것이다 - 지방 공무원들이 자기들에게 ...심게 했던 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렸다. 이 무식한 사람들은 너무 몰상식한 나머지 정작 독립이 되면 나무가 더 많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 1919년 5월 5월 10일 일기

 

기고자는 조선 민족에게 정력과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결정적 증거로서, 300여 년 전에 일본 침략자들이 땅바닥에 팽개쳐놓고 간 서울 파고다공원 탑의 상부 3층 옥개석을 조선인이 지금껏 그대로 방치해온 사실을 들었다. 이 논지가 맞는 건 사실이다. - 1920년 9월 22일 일기

 

조선인은 장난감이 큰 이윤을 남길 수 없는 시시한 품목이라는 이유로 장난감 만드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조선인은 대기업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감히 대기업을 운영할 수도 없다. 결국 조선인은 '안하는' 것과 '못하는' 것 사이에서 어영부영하다가 점점 이 분야에서 소외되어간다. - 1920년 12월 11일 일기

 


 이런 현실 인식을 갖고 있던 그에게 1940년대의 대일 협력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었다. 그는 일본의 군국주의 통치가 심화되어 조선인 탄압이 강화되자 한 편으로는 조선인의 호전성과 군사적 능력을 함양하기 위하여, 한 편으로는 일제 치하에서 조선인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원병제와 창씨개명에 찬성하고 총독부의 요구에 순응하며 학도 지원병 입대를 독려하는 글들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4. 윤치호의 선택에 대한 나의 생각


 윤치호 일기를 읽고 나서 윤치호를 미워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의 우리 민족과 국토에 대한 사랑, ‘애국에는 여러 길이 있다.’는 그의 생각, 강점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속한 조직과 가족을 지켜야 했던 그의 고민들이 일기를 통해서 진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지향 교수가 『윤치호의 협력일기』에서 논하듯이, 서구 사학계에서는 1970년대 이후 탈식민주의 역사 이론이 대두되면서, 강점기에 협력자의 위상이 재평가되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나치 점령기에 드골을 중심으로 일부를 제외한 모든 국민이 나치에 저항하고 해방을 갈망했다는 ‘4천만의 저항’이라는 신화가 68운동으로 인한 드골의 하야 이후 재평가되면서, 협력의 가치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실제로는 나치 점령기에 소수만이 나치에 저항했으며, 대부분은 관망하거나 소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당시 나타난 협력과 저항의 구조는 선악 대립 구도로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았으며, 양면성과 다양성을 지닌다는 견해가 부각되었다. 마찬가지로 윤치호는 친일 노선을 따르면서도 시종일관 자신이 이완용 같은 반민족적 친일파와는 다르다고 생각했고, 스스로를 민족의 안녕과 실력 양성을 위해 매진한 애국자라고 생각했다.

 

 

서울대학교 박지향 교수      『윤치호의 협력일기』


 윤치호의 일기를 읽으며, 친일파들을 단순히 ‘친일파’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일파를 단죄하는 것만큼 그들의 다양한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느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협력과 저항을 동일한 지위에 둘 수는 없다.


 일부 주장처럼 협력과 저항이 모두 애국적 행동이었다고 하더라도, 협력과 달리 저항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윤치호는 일기(1919/7/31)에서 ‘105인 사건 이후 나에겐 저항할 용기가 없어졌으며, 연로하신 어머니와 어린 아이의 건강과 행복이 무척 중요하다.’며 자신의 공포를 시인했다. 이에 비해 저항은 죽음이라는 본질적 공포를 극복해야만 결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저항을 택한 수많은 독립투사들은 윤치호와 달리 독립을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했다.


 또한 협력이라는 윤치호의 결단은 국제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는 다르게 여러 오류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그는 ‘민주주의로 성공을 이룬 나라는 영국과 미국 뿐(1945년 서한)’이라 주장했지만 이는 소위 ‘성공’의 범주를 매우 좁게 본 결과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은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않고는 완성될 수 없음을 외면한 발언이었다. 실제로 독립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많은 부침을 겪었지만 결국 1987년 이후 성공적으로 정착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요컨대 그의 협력에는 민족성에 대한 부정적 편견, 현실과 유리된 국가관, 공포에 저항할 용기의 부족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5. 글을 맺으며


 윤치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뛰어난 지성을 가진 민족 지도자였음에도, 역사의 갈림길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그의 선택은 그 스스로도 진정성을 갖고 한 것으로 충분히 이해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결코 옳은 선택은 아니었다.


 동시대인으로서 옳은 선택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무장 독립 운동을 진행한 사람들도 있었고, 실력 양성 운동을 진행하면서도 일제 말기에 협조하지 않으며 변절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핵심적 차이가 용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윤치호는 현실주의자를 자처했으나, 결국 일제 말 극단적 공포 앞에서 자신의 현실 인식까지 왜곡하게 되었고, 이것이 과오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윤치호와 다른 사람들의 선택, 그리고 그에 대한 역사의 준엄한 평가는 100년 후를 사는 우리에게 올바른 선택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용기를 요구하는 행위인지 시사하고 있다. 충분한 고민, 그 고민을 실천하는 옳은 일을 행하는 용기. 이념이 부재한 방황의 시대를 헤쳐 나갈 소중한 실마리를 찾은 셈이다.

 

조선사람 하에서건 혹은 외국의지배 하에서건 조선에는 철도와 증기선과 우편시설과 전보가 들어서고 그것들이 조선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켜 서기 2000년의 조선은 지금의 조선과 비교할 때 새로운 창조물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 초가집들은 벽돌집이 되어 있을 것이고, 나무 한그루 없는 이 헐벗은 산천은 아름다운 꽃과 나무로 덮여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고통을 감내해온 수백만 조선 사람들은 더 이상 궁궐에 떼지어 몰려있는 점쟁이들, 내시들, 관상쟁이들을 보조해 주기 위하여 착취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의한 대로 세금을 내고 도로와 학교와 국방을 효율적으로 유지할 것이다. 때때로 나는 300년 후에 다시 찾아와 조선이 겪었을 변화를 보고 싶다. - 1900년 12월 30일 일기


 윤치호는 일기(1900/12/30)에서 2000년의 조선을 그리며, 300년 후 조선의 변화한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2000년 하고도 13년이 더 지난 지금, 그가 현재의 한국에 온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에 만족할까.

 

 

 

 

 

 

 


 

 

 

 의경 독후감 대회에 냈던 글인데 결과는 당연히 광탈. 이런 것 말고 좀, 그러니까 나처럼 지나치게 사색적이고 아주 약간 운동권의 내음을 풍기는 것 말고, 밝고 그런 걸 썼어야 하는데 싶어요. 무엇보다 분량 제한이 있다고 분량을 억지로 줄였는데, 너무 줄인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냥 적당히 긴 분량으로 쓸 걸 하는 생각. 나의 생각은 이 때와 그렇게 달라진 건 없음.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 10점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엮음/산처럼

 

윤치호의 협력일기 - 8점
박지향 지음/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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