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소설)

대구에 내려갔을 때 동생이 사 놓아서 읽게 된 소설. 작가는 그린피스에서 활동할 만큼 열성적인 환경주의자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내용도 자연과 '양키' 또는 '읍장'으로 대표되는 야만적인 서구문명의 대결 같은 느낌, 그러니까 환경주의의 팜플렛 같은 느낌이었다. 구성과 전개는 좋고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는 비장미와 숭고미마저 감돌지만, 역시 자연 vs 인간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표현되는, 클리셰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등장인물들을 단순화시켜버린 환경주의적 이념 과잉이 느껴져서 읽고 나서는 글쎄... 별 세 개 정도 주고 싶다.


2. 김영하, 『보다』(에세이)

관찰력 + 글빨의 간지 시너지를 보여주는 김영하의 에세이집. 김영하의 비문학은 처음 읽는데, 소설의 내용들이 그렇듯이 글들이 날카로운 것 같다.


3. 다이허우잉, 『사람아 아, 사람아!』(소설)

소설을 읽으며 즐거움을 느낄 때 중 하나는 소설을 통해 한 때 존재했던 '다른 세상'에 대해 깨달을 때일 것이다. 옛 시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비문학으로 충분하지만, 그 세계에 살아 보기 위해서는 문학이 필요하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나오던 시절 서구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 총을 들고 외국의 전장으로 달려갔다. 마찬가지로 다이허우잉의 이 소설의 배경, 문화대혁명과 그 이후, 개방 전의 중국 사회 역시 지금과 거의 다른 세계이다. 대자보와 문예 비평, 휴머니즘과 마르크스주의를 놓고 싸우는 이 소설의 배경은 중국보다 오히려 처음 대학에 입학하던 시절의 캠퍼스를 떠올리게 했다. 물론 그 때만 해도 이미 운동권의 세력은 매우 약해졌지만, 자보는 어딘가에 계속 붙었고 자보를 읽는 사람도, 자보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시계를 2010년에서 20년 정도 더 뒤로 돌리면, 다이허우잉의 소설에 나오는 사회와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될 것 같다.

다만 그와 별개로 소설을 읽기는 꽤 즐겁지는 않았는데, 일단 내 독해력이 떨어져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문장이 매끄럽게 읽히지 않았고, 화자가 너무 자주 바뀌어서 혼란스러웠으며, 무엇보다 여러 개의 주 주제 중 '휴머니즘'과 '마르크스주의'가 서로 반대되는 것인지 조화하는 것인지에 대해 등장인물들이 다투는 것이, 이 소설의 배경이 정말 '옛날'이라는, 그러니까 현재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구나 하는 느낌을 주어서. 그렇게 치열하게 논쟁하고 투쟁하던 사람들, 교조주의자, 개량주의자, 수정주의자, 정통주의자들은 지금 중국 어디에 있을까.


4. 김애란 外 11인, 『눈먼 자들의 국가』(에세이)

세월호 사건에 관한 문인/학자들의 글을 모은 책. 의경은 정치적 중립 의무가 있기에 뭐라 의견을 쓰긴 그렇고, 다만 읽고 나니 박민규의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그런데 박민규보다 편혜영을 먼저 읽었네.


5. 우치타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철학 입문서)

철학에 대해 너무나 무지해서, 얇고 쉬울 것 같아 진중문고에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처음부터 저자도 구조주의에 대해 잘 모른다고 고백하며 들어가서 도대체 뭐하자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많은 것을 다루기보다는 핵심 개념 위주로 간략하게 다루는데, 투자한 시간에 비해서는 재밌고 괜찮은 책이 아니었나 싶다.


6. 칼 세이건, 『코스모스』 (과학)

내가 항상 닮고 싶었던, 항상 존경할 수밖에 없는 칼 세이건이지만, 코스모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처음. 무엇보다 나의 얕고 넓으며 여러 분야에 균질하지 않은 지식 때문에 어떤 부분은 아예 모르고 어떤 부분은 들어봤고, 이런 것들 때문에 코스모스를 읽기가 달갑지 않았지만, 말년 버프도 있고 해서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읽었다. 처음에 나오는 세네카의 인용구는 볼 때마다 항상 가슴이 뛴다. 항상 세계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품고 우리가 사는 세계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과학에 대해 항상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칼 세이건이 오래 살지 못하고 96년에 죽은 것이 너무나도 아쉽다. 지금처럼 다시 민족주의와 종교적 광신주의같은 극단적 이념갈등들이 분출하는 시대에 칼 세이건이 살아 있다면 그래도 합리적이면서 옳은 지식인이 어떤 사람인 지 모두가 알 수 있을 텐데.


7. 편혜영, 『재와 빨강』(소설)

읽는 동안 정유정의 『28』을 읽던 생각이 났다. 전염병을 다룬 소설이면, 그래도 문학이라면, 적어도 이랬어야지 하는 뒤늦은 불평. 물론 고종석이 말한 대로 그냥 문학이 하나의 기예일 뿐이라면, 정말 그러할 뿐이라면 서정주의 친일과 친군부 행보도, 수많은 문학인들의 추한 말로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인간의 본능인지 사회적 통념인지 뭐시긴지, 문학은 다른 예술 장르보다 문학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고상'해야 하고, 한 차원 높은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니까. 28을 읽는 동안에는 흔한 오락영화를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 오히려 시청각적 자극이 없으므로 더 따분한 느낌이 들었다면, 처음 읽은 편혜영의 이 소설은 단순한 질병-오락영화적 소설을 뛰어넘어, 전염병의 발생(outbreak)을 통해 인간의 조건과 카프카적 존재의 불안을 이야기한다. 스토리가 개운하게 끝나진 않지만, 숨 쉴 새 없이 빠르고 재미있게 진행되는 뛰어난 오락 소설이 아니라면, 소설이 끝나고 가슴 속에 응어리가 좀 남는 게 소설의 원래 목적에 부합하지 않을까.


8. 편혜영, 『아오이가든』(소설집)

7번 소설을 읽고 바로 집어든 편혜영의 소설집. 7번에서 불쾌하고 불결한 소재들만 다뤘던 것과 달리 이전에 쓴 8번 책에서는 시체, 구더기, 괴물, 이런 것들을 계속 다룬다. 역시 제일 좋았던 건 표제작 '아오이가든'. 뭔가 코스믹 호러 같기도 하고. 정말 우수에 차 보이는, 그래서 그런 쓸쓸하고 섬뜩한 소설만 쓰는 한강과 달리, 얼굴만 보면 굉장히 밝게 웃는 평범한 새댁 아줌마처럼 생겼는데 어떻게 이런 것들만 쓰는지 참으로 ㅎㄷㄷ하다는 나의 궁금증을 반영하듯이, 이 책에는 소설가 사진을 존나 어둡고 똥씹은 표정 짓고 있는 사진으로 해 놓은 게 함정.

12월 들어 2권을 더 읽어서 입대 이후 총 141권을 읽었다. 작년 이맘때의 생각보다는 적게 읽은 거지만 이 정도면 독서 쪽에서는 나쁘진 않았다 싶다. 공부나 운동을 망해서 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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