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여행 다섯째날(2): 2015년 8월 22일 토요일, 14:00




 그렇습니다.





 바로 직전 고지에 올라온 저는, 눈 앞에 펼쳐진 새로운 풍경에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거북이의 등껍질처럼 딱딱하면서도 빈틈 없이 채워진 표면,



 그 표면이 갈라진 날카로운 부분이 저의 낡은 뉴발 운동화를 사정없이 공격하였습니다.






 게다가 처음에는 글자 EG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오오 역시 길을 잘 들었어... 생각했지만,









이 곳에서 더 올라갈 길이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갈라진 대지 너머로 보이는 것은 오직 깎아지른 봉우리들 뿐, 더 이상 나아갈 곳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갈라진 대지 너머의 깎아지른 봉우리를 찍은 사진이 없네;; 절망이 너무나 컸나 봅니다. 뭐 어차피 여기랑 비슷하게 생김;;





물론 내려갈 곳도 보이지 않음 ㅎㅎㅎ






















그런데 그 때 뭔가 꼬물거리는 것을 포착;;






너무 멀어 저의 안 좋은 눈으로는 성별 구별도 안 되는 한 명의 사람이, 흰색 개 한 마리를 앞세워 길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으아아아아아 저 곳이 길이었구나. 그렇습니다. 저번 편에서 '힘들게 올라왔는데 갑자기 내려가야 한다.'고 할 때, 이상한 걸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잘 안 보이신다구요? 



 빨간 동그라미 안에 사람이, 파란 동그라미 안에 흰색 개가 있습니다.



 개는 무지막지하게 길을 잘 찾아 빠르게 올라갑니다. 아니 어떻게 개가 정상도 찾아가지. 정말 잘 찾아가는 것 보니까 저보다 123091374배는 영리한듯 ㅠ



 어느덧 제대로 된 고지에 오른 인간의 형체. 부럽다ㅠ







 



 올라온 곳은 네 발로 기어서 겨우 올라온 엄청난 급경사. 앞으로 나아갈 곳은 다 더 말도 안 되게 높은 경사의 봉우리들 뿐. 사방을 둘러 봐도 출구는 없고, EG라고 적힌 두 글자의 알파벳 외에는 인간의 흔적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곳. 가장 가까운 인간은 단 한 사람, 저기 올라간 사람 뿐이고 불러 봤자 소리가 들릴 지도 모르겠고, 지평선 위로는 눈으로 겨우 인지 가능한 소방헬기 하나가 돌아다니고 있었고, 게다가 구름까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순간 제갈량에게 속아 호로곡으로 들어온 사마의가 생각났습니다. 아아 내려가는 길의 발자국에 속아 이런 먼 사지까지 들어오다니.






이 곳이 나의 죽을 자리인가







 갑자기 온 몸이 서늘해집니다. 다행히 가방 안에 종이와 필기구가 있으니 유서는 어떤 식으로 쓸까 생각합니다. 종이에도 남기고 핸드폰에도 남겨서 최대한 비 안 맞을 것 같은 자리에 보관해야지... 생각했는데 여기가 워낙 황량한 곳이고 오랫동안 침식된 곳이라 그런 곳도 없어 보임 ^_^;; 










 그러다가 유서보단 영정 사진을 먼저 남기는 게 낫겠다 싶어, 내가 죽게 될 곳들의 광경들을 배경으로 영정 사진을 찍어 보았습니다.














영정 후보 제1호






영정 후보 제2호




영정 후보 제3호




영정 후보 제4호



 다 죽음을 앞둔 결연한 표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ㅠㅠ 으아아 저는 배경은 1호가 좋지만 표정은 2호가 좋네요. 영정으로 쓴다면 2호를 쓸 것 같습니다. 














최종_채택_영정.jpg















 그 와중에 아재와 흰 개는 내려오는군요. 너무 허탈하고, 힘도 빠져서 말도 안 나옵니다. 제 갈 길을 가도록 합시다.







 난 정말 여기서 죽는 걸까. 죽는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습니다. 이런 낮은 산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 죽는다니, 얼마나 쪽팔린 일인가. 준비 하나도 없이 아이슬란드로 오다니 이렇게 철도 없는 일이 있을까. 그런데 죽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왜 핸드폰은 신호가 하나도 안 잡힐까. 다음 사람이 오면 소리를 최대한 질러 볼까. 정말 여러 가지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정작 내가 새로 올라온 이 곳을 제대로 둘러보지도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 희망을 찾아 보자. 








 엥!? 여기 완전 가망 있어 보이는 곳 아니냐?




아니네요.




다른 곳인데 여기도 아님.




아... 진짜 너무합니다.ㅠㅠ




 경치는 좋은데 심장이 떨려서 나아가지를 못하겟음. 조금만 헛디디면 발이 미끄러져서 죽을 것 같았습니다. 비까지 왔었으니 ^_^;;






도대체가 이 미친 놈의 고지는 둘러싼 게

낭떠러지와 절벽 뿐인가





그리고 절벽일 거면 다 절벽일 것이지 한 군데는 애매한 절벽으로 해놔서 엄한 사람 죽게 만들고 아아 ㅠㅠ




 도저히 답이 없는 상황에 절망한 저는, 만악의 근원인 제가 올라온 처음 올라온 곳으로 돌아와 발 사진을 찍어 봅니다. 원래 헬가펠 정상 올라가면 찍으려고 했던 샷인데, 억울해서 여기서라도 찍어야겠다. 부들부들. 그런데 꼴에 무서워서 모서리엔 다가가지도 못합니다. 쫄보 인증잼ㅠ








 그런데 혹시나 해서 옆을 보는데...







엥!?






 분지로 내려오는 완만한 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충 개념도를 그리자면 이렇습니다.




(발로 그려서 죄송합니다.) 


 붉은 색은 낭떠러지, 검은 색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곳이라고 보면, 대충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진짜 묘하게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서 올라올 때도 저런 길이 있는 지 몰랐고, 올라가서도 사람을 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ㅠㅠ 내려갈 때 뭐 개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엉거주춤하게 서서 내려가면서, 왜 난 기어서 올라온 것인가... 하는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분지에서 보는 정상 가는 길. 너무나도 아쉽지만 정상은 포기해야겠습니다. 너무 급한 감정의 변화를 겪어서 다리도 후들거리고 구름도 다가옵니다ㅠㅠ



 사실 헬가펠 정상 찍었다고 구라칠까 생각도 0.1초간 했었는데 아이고 의미없다. 나중에 다시 와서 정ㅋ벅ㅋ하겠노라 다짐합니다.




 사실 분지까지 올라오는 길도 꽤 급경사였기에 내려갈 때도 약간은 위험하다 싶었습니다만 아까의 일을 생각하면 꿀오브꿀




 이건 뭐 50m도 안 올라온 발샷행... 그치만 괜히 발로 산이 다 가려지고 분지가 보여 찍고 싶어졌습니다.




 점점 다가오는 평야.



 아아 그리웠어 평지야 ㅠㅠ



 그러고 보니 있는지도 몰랐던 레몬탄산음료를 꺼내어 먹습니다. 역시 생명에 위협이 느껴질 때는 모든 욕구가 일시정지되는 듯 하네요...



 다시 갖게 된 황량함!의 대지의 품. 저 멀리서 새로이 다가오는 사람들이 보이는군요. 저 분들은 저의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할텐데...



 기분이 좋았는지 동영상까지 찍었습니다. 죽음에서 풀려나서 기분이 좋아졌나. 



 정상에 오르지 못해 아쉬운 헬가펠.ㅠㅠ 다시 올라가는 게 나을까 생각했지만,



 바로 비가 오네요. 완전 젖기 전에 빨리 갑시다.



 출발지에 돌아와서 지도를 보면서 저의 실수를 깨달았습니다. 굵게 표시된 노란색 순환선과 그보다는 얇지만 여전히 굵게 표시된 노란색 선 두 개는, 'Marked Route'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처음에 본 주황색 막대같은 마크가 되어 있다는 거죠. 그런데 제가 택한 곳은 지도에서는 얇게 표시되어 있는 최단루트인데, 'Unmarked Route'입니다. 왜 처음엔 주황색 막대가 서 있었는데 갑자기 없어졌을까 하는 의문은 한 번도 갖지 않고, 처음에 보고 찍어 둔 지도도 다시 확인하지 않고, 그냥 최단거리에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고 우왕ㅋ굳ㅋ 하며 올라간 제가,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었습니다. 으아아아아 ㅠㅠ



 물론 중간에 제대로 된 길 찾아서 올라갔으면 모르겠지만요. 근데 제가 그 길을 보지 못한 건, 그 길도 길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엄청나게 가파른 길이었다는 것이었다는 결론이 충분히 나오니 결국 제가 이상한 지름길로 간 게 원인입니다.



 사실 쓰란두르 씨, 뭐가 로컬들 하이킹 코스에요 존나 사기꾼이네 하고 잠깐 생각했는데 지도를 보면서 다시 반성하게 됩니다.




 야아 비 온다 비 온다. 비 맞으면서 5km을 걷는다.





 가다가 본 트램플린과 작은 축구 골대가 있는 집. 너넨 당연히 차 타고 레이캬빅 가겠지.




 비가 곧 그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미친 갑자기 퍼부어 댑니다. 퍼부어대는 비 사이로 다시 돌아본 헬가펠의 사진입니다.


 우산을 쓰고 후드를 입었지만, 바람까지 불어서 막 비에 몸이 젖습니다. 신발은 물이 새어서 완전 패망했습니다. 양말이 완전 축축히 젖어 매우 기분 좋은 상태로 레이캬비크로 걸어갑니다. 비가 계속 이렇게 오니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습니다.





 음악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어폰을 안 가져와서 못 듣는다는 생각이 들어 생각을 지웠다가 다시 생각을 예토전생합니다. 어차피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데 이어폰 안 껴도 되잖아? 그래서 핸드폰 스피커로 음악을 틉니다. We'll carry on, We'll carry on...







 그런데 사실 전 컴앞대기니트족인데다가 한국에서는 휴대폰으로 음악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인터넷으로 들었기 때문에, 휴대폰엔 하도 많이 들어서 사골이 된 노래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감정의 폭발을 이기지 못한 저는 빡쳐서 노래를 부릅니다. 처음에는 휴대폰에도 들어 있던 Welcome to the Black Parade를 따라 부르다가, 나중에는 오~ 샹젤리제, 오~ 샹젤리제를 부릅니다. 분명히 주변에 귀 열고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아이슬란드에서 머리가 다쳐서 여기가 파린 줄 아는 미친 놈 지나가는구나 생각했을 듯...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는 섬나라고 모든 도로는 레이캬비크로 통한다. 드디어 상상 속의 샹젤리제 거리도 끝이 나고 하나 둘씩 건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퍄퍄퍄. 이미 제 양말은 모든 부분이 균질하게 수분을 최대의 양으로 흡수한 상태였습니다.






 거의 버스 정류장에 다 다가가서 본 전봇대. 무슨 스테이플러가 다다다다다다다다닥 박혀 있는 걸 보니 무섭습니다. 영화 호스텔이 생각나네요. 그래도 살아 돌아왔으니 어디야.





 으아아아 다시 보는 인간 문명.




 오늘은 토요일. 버스는 한 시간에 두 번 옵니다. 기다립시다.





 콘크리트 계단인데 신기하게 위쪽은 덜 젖고 아래쪽은 다 젖었네요. 부실공사를 해서 투수가 매우 잘 된다던가 그런 것인가. 아무튼 앉아 버스를 기다립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버스 정류장이 헬가펠 쪽에 가까운 게 한 군데 더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먼저 내리고 먼저 올라타서 500미터는 족히 더 걸었을 듯 하지만, 뭐 이미 다 지났으니 됐습니다.




 1번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대기 중. 어차피 숙소로 가려면 도심 쪽으로 접근해야 하기에 탑니다. 이 때만 해도 컬쳐 나잇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빨리 이 빌어먹을 양말 좀 벗고 발 씻고 편히 쉬자는 생각 뿐이었지만...




 엥!? 이거 완전 5515 버스 아니냐?










 아이슬란드에서 버스 타면서 좌석이 꽉 찬 것도 본 적이 없는데 입석까지 꽉 찼습니다. 옆에 앉은 10대로 보이는 남자애한테 물어봤는데, 대부분 축제 가는 것 같다고... 이 축제가 고로케 대단하단 마뤼야? 갑자기 그래도 축제 보고는 가야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슬란드에서 보낼 날이 이제 만 이틀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이대로 끝내기는 원통해 ...!




















꼐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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