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6일, 일요일
어제 페라스의 생일 파티로 늦게까지 놀고 나서, 저는 또한 해가 중천에 걸린 후에야 일어납니다. 바야흐로 오후 12시, 사실상 제 입장에서는 굉장히 이른 기상이기는 합니다.
이른 기상을 한 기념으로 뭔가 다른 요리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자랑 계란 좀 그만 삶고 뭔가 다른 것... 다른 것.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계란찜 생각이 나서, 자취할 때 몇 번 해 먹었던 전자레인지 계란찜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릇에 계란을 풀고, 물을 좀 붓고, 소금을 뿌리고, 우유를 좀 넣으려 하는데 우유가 없네요. 어쩌지 어쩌지 하다가, 잠깐 우유를 빌리기로 하는데...
.... 후두둑
우유를 기울이자 나온 것들은, 제가 생각한 흰색 줄기가 아니라, 불길한 흰색 덩어리들이었습니다.
유통기한: 8월 25일
도대체 이거, 지금까지 안 버리고 뭐한 거냐고 따지고 싶은 생각도 문득 들었지만 몰래 우유 갖다 쓴 주제에 따질 수도 없고 ^-^;; 오히려 도둑이 제대로 속아 넘어간 꼴이 되었습니다.
아 진짜 계란찜이고 뭐고 다 때려치려다가, 이렇게 된 이상 더 제대로 해 먹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으아아아아 분노한 저는 마트에 가서 우유와 계란 등등을 재빠르게 사 옵니다.
그리고 비장의 무기...
마늘
어디에 넣어도 깊은 풍미를 더해주는 한국인의 필수 조미료 마늘...!
사실 서양에서는 마늘 냄새 나면 싫어한다 그래서 좀 걱정했는데 뭐 저한테 얘기를 안 하는 건지, 아직 그런 느낌을 못 받았습니다. 당장 남유럽 사람들만 해도 마늘을 많이 먹어요. 아무튼 더 채를 썰어야 마늘 맛이 퍼질 텐데, 더 이상 채 썰기는 귀찮고 해서 그냥 저 정도 썰었습니다.
완성된 계란찜...인데 비주얼은 좀 그래도ㅠㅠ 굉장히 맛있었습니다. 다만 맛이 조금 싱거워서 간장을 넣어 먹었습니다.
그리고 저녁은 드디어, 얼마 전에 샀던 삼겹살을 먹는, 최초의 삼겹살 시간.
이것도 비쥬얼이 ㅠㅠㅠ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이 때쯤 되니 슬슬 긴장이 풀어졌었나 봐요. 완전히 핀란드에 적응한 게 느껴지는 사진입니다. 한국에서 뭐 열심히 사진 안 찍었었으니까...
삼겹살은 보통 K수퍼마켓에서 팝니다.. 작은 K마켓 말고, 육류 코너가 있는, 캄피나 콘툴라에 있는 꽤 넓은 곳에는 꼭 팝니다. 다른 곳에서는 파는 지 모르겠네요. 리들에선 안 파는 것 같고. 가격도 그렇게 비싸지 않아서 저의 경우 요즘은 거의 주식입니다. ^_^;;
두 개를 뜯었더니 엄청 많아 보입니다. 진짜 웃긴게 오랫만에 먹는 삼겹살이라 그런지, 저걸 보고도 답이 없다고 생각을 안 했습니다ㅋㅋㅋㅋ
그렇지만 답이 없는 건 너무 명백하여 곧 깨닫게 되죠. 그런데 이미 삼겹살 통들은 다 버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멍ㅋㅋㅋ청ㅋㅋㅋㅋㅋ
그렇습니다.
답이 없습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답이 없는 현 상황을 맞아, 저는 그냥 강행돌파하기로 결정합니다. 아몰랑 일단 다 굽고 생각하자^_^
그리고 항상 옳은 기름, 항상 맛있는 기름 버-터를 투하.
물론 한국에 조금만 살아도 알게 되는 사실, 삼겹살 굽는 데는 버터가 필요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버터를 넣어 먹으면 그 풍미가 좋아서 버터에 삼겹살을 굽는 걸 좋아합니다. 기름+기름덩어리=기름*2. 기름이 이리도 많다니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네요.
그리고 여러분은 못 보셨겠지만 미리 썰어놨던 양파와 파프리카, 그리고 마늘을 투하합니다.
괜히 중국집 주방장처럼 기분을 내면서 마구 휘저어 줍니다. 엣헴엣헴. 아래쪽에 삼겹살이 약간 덜 익었네요. 다 구웠을 떈 익었을 겁니다 ^_^
그런데 삼겹살을 굽다 보니까 가위가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_^;; 뒤늦게 발견했는데 지금 와서 칼로 자르 수도 없어서, 그냥 통인 채로 구워 냅니다.
으아아 삼겹살ㅠㅠ
비록 조악한 삼겹살이지만 이역 만리에서 삼겹살을 보는 그 감정은 참으로 남다릅니다.
그리고 가위가 없으므로 삼겹살을 마치 스테이크처럼 나이프로 잘라 먹는 진풍경을 보실 수가 있었습니다 ^_^;;;
그렇게 먹고, 먹고, 또 열심히 먹었건만...
처음에 삼겹살 두 세트를 뜯었을 때부터 재앙은 예견된 거였죠. 약 6~700g 가량을 요리했는데, 아무리 고깃집 1인분이 적다고 해도 3인분은 저같은 멸치가 먹기엔 무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저히 이걸 어떻게 할 지를 모르겠더라구요. 이걸 그냥 통쨰로 냉장고에 넣어야 하나? 고민하던 도중...
러시아인 플랫메이트 안드레이가 절 보더니 툭 던집니다.
"플라스틱 통에 넣으면 되잖아?"
아니 통이 있었단 말인가...?
있었습니다.
...아니 그럼 진작에 삼겹살 안 굽고 너무 많다 싶었을떄 통에 넣어서 냉동실에 넣어 버렸으면 됐을 텐데 ㅠㅠㅠ하는 생각이 온 몸을 휘감지만 일단은 삼겹살을 맛있게 먹었으니 즐거이, 즐겁게, 즐겁게 남은 삼겹살을 냉장고에 보관하며, 개강 전 마지막 일요일을 마감합니다.
과연 개강하면 나의 삶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꼐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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