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삼아 페이스북에서 지금 쓰고 있는 교환일기를 '사진고고학'이라고 칭한 적 있다. 이름은 '일기'인데, 정작 20일 전의 일을 쓰고 있으니 고고학이 아닌가.


 그런데 쓰고 보니 고고학은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고고학이라는 학문은 선사시대, 결국 남겨진 기록이 없는 시대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그 시기의 삶과 모습을 추적하는 학문인데, 나의 경우는 내가 쓴 글은 없더라도 내 머리 속에 든 기억이 있으니까. 블로그에 이렇게 써야지, 했던 (부질없는) 기억들. 내가 느꼈던 주관적인 감정들. 생각들. 그 편린들이 남아있고 결국 내가 쓰는 글에도 그러한 내용들이 반영되는 것을 보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사진고고학이 아니라 사진역사학이다. 


 이러한 감정과 생각들이 사라지고, 켜켜이 쌓인 시간의 먼지로 탈색되어 머리 속에 남은 것은 잿빛 심상 뿐이고, 남은 사진이 전달하는 정보의 수준과 별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 그때야말로 내가 할 지도 모를 그 작업은 사진고고학이 될 것인데, 결국 내가 이렇게 사진역사학을 하면서 나의 게시물들을 정리하는 것이 내 사진들이 사진고고학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구나. 


 그러니까 열심히 쓰겠습니다.







2015년 8월 11일, 화요일


 

 

 

 어쨌든 지금까지 신세를 진 핀란드 학생은 학교를 다녀야 해서 낮엔 못 보고, 걔네 집이랑 제 집도 멀고, 케미도 잘 안 맞는 것 같아서(물론 제 인성의 문제가 크겠으나^_^) 저는 제 HOAS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여전히 밤 사이에 아무도 왔다가지 않은 듯한 아파트, 텅 빈 거실로 내리쬐는 햇살을 보고 있자니 정말 무인도에 남겨진 것 같다는 중2병스러운 착각이 들었습니다. 무인도라뇨. 개소리죠. 주변에 널린 게 영어 하는 사람이고 호주머니엔 환전해 온 현금도 많이 남아있었는데(자랑아님). 그렇지만 그땐 웬지, 그렇게 느꼈습니다.

 

 

 

 

 무인도에서 살아남으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 어느 정도인 지 알아보는 것이죠. 물론 지금 쓰고 있는 이 키감 참 쓰레기같은(다른 건 다 좋습니다) 인민에어4를 비롯해서, 한국에서 가져온 배낭 하나 캐리어 하나 분량의 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 일기를 처음부터 보셨으면 알잖아요. 너무 급하게 챙겨서 정작 필요한 물컵 접시 이런 건 하나도 없음ㅋㅋㅋ 젓가락 하나 달랑 가져왔습니다 여기 젓가락 없을까봐.

 

 

 

 

 그래서 내가 가진 자원이 어느 정도인가 정찰하려고 부엌을 쑤셔보는데...

 

 

 


 

 

오오...

 

 

 

 

 

 

 

 

 

 

 

 

 

오오...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존나좋군?

 

 

 

모처럼 핀란드까지 왔으니 북극곰도 ^오^

 

 

 

 

 아무튼 이로 인해 식기/취사도구 등은 해결되었습니다. 저 넘쳐나는 식기의 향연...

 

 

 

 

 이 글을 읽으시는 분 들 중, HOAS에 입주하셔서 아무것도 없었던 분들 분명히 계실거에요. 뭐 어쩌겠어요 인생이 이런건데. 여러분 한국에 식기 많잖아요. 저 진짜 여기서나마 금수저 한 번만 좀 해봅시다 ㅠㅠㅠㅠ

 

ㅇㅇㅇ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꽉 찬 찬장을 보고 너무 행복했듬...

 

 

 

 

 

 이전에 산 중국인 학생들이 있었던지 중국 소스랑 약도 몇 개 놔두고 갔는데, 그건 유통기한 지난 것도 해서 신경끕니다. 저 식기만 씻어서 써도 얼마야...

 

 

 

 

 

 

 

 

 여러분, 이래서 제가 헬싱키의 '로빈슨 크루소'라고 제목을 단 거에요. 로빈슨 크루소 책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로빈슨 크루소는 난파당한 주제에 무슨 가진 게 그리도 많습니다. 우리 다니엘 디포 선생님께서 로빈슨 크루소에게 무한한 자비를 베푸셔서 배가 암초에 걸려서 넘어 갈랑말랑넘어갈랑말랑 계속 밀당하는 동안, 로빈슨 크루소는 배 안에 들어가서 털어올 거 다 털어옵니다. 사람은 하나인 주제에 총을 열다섯자루나 갖추고 벙커를 만들고, 곡물을 경작하고, 나중엔 노예까지 부리는 무지막지한 놈이 로빈슨 크루소에요. 가히 조난자계의 재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로빈슨 크루소 하고, 혹시나 일찍 오셔서 사람도 없는 기숙사에 혼자 계시게 된 교환님들은 페덱스 택배 급도 안 되는 짐 뜯어보면서 배구공에 물감묻혀서 소리나 지르셈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미 죽창맞은 블로거입니다.)

 

 

 

 

 

 

 

 

 

 죄송합니다 항상 죽창을 조심합시다. 넵.

 

 

 

 

 

 

 

 

 한편 적막에 싸인 한낮의 아파트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솔직히 혼자 사는 집 안 같습니다.

 

 

 

 

 

 

 

 

...아무튼 너무 쉽게 식기/조리기구 문제가 해결되어 허무하지만, 이번 편의 테마는 학습이 될 것 같습셒슾....

 

 

 

 

 

지금까지 안을 살폈으니 밖을 살펴야 할 때가 되었고, 어제도 갔던 마트로 가서 뭔가 배워봅시다.

 

 

 

 

 

 

 

 목표는 바로 이것. 핀란드의 맥주. 원래 어떤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술을 마셔야, 그 나라를 제대로 느낀 거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핀란드에도 토종 맥주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토종인지 수입인지 전 잘 구별은 못합니다만 Sininen은 핀란드어 맞는 것 같아요.

 

 

 

 

 

 

 

 

 

 핀란드에서 꼼꼼하게 살림하려면 알아두어야 할, 공병보상금. 다 마시고 나서 공병을 가져가면 캔류는 15센트, 페트병류는 20센트를 다시 돌려줍니다. 은근히 쏠쏠합니다. 마트에서 89센트 정도 헐값에 파는 캔맥주는 공병보상금은 제하면 74센트가 되죠. 사실 밖에서 마신 캔은 가방 안에 흐를까봐 가져오기가 쉽지 않지만, 페트병은 꼭 챙겨오게 되더라구요.

 

 밖에서 술을 마실 때 주변에 공병을 줍는 노인 분들이 계시면 그 분들께 드리거나 그 분들 눈에 잘 띄는 곳에 모아 놓으면 윈윈할 수 있기도 합니다. 사실 한국도 재활용품 수거하시는 노인 분들이 많은데, 핀란드 정도는 아니더라도 인간적인 삶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 보장되길 바랍니다.

 

 

 

 공병은 초록색 버튼을 누른 뒤 기계에 투입하면 자동으로 캔/페트병이 분류되고, 금액을 계산하여 바우처를 뽑아 줍니다. 이를 계산대에 제시하면 현금을 받을 수 있고, 아니면 쇼핑을 한 후 계산할 때 말 그대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14유로 쇼핑을 하고 공병보상금 바우쳐 2유로가 있으면, 이를 먼저 제하고 12유로로 계산하는 식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산 맥주를 가져가서 설정샷.

 

 

 

 

 캬....

 

 

 햇살, 맥주, 게임... 삼위일체

 

 

 무릉도원이네요 ^오^

 

 

 

 

 

 그러나 왠지 게임은 하기가 싫습니다. 구라파까지 게임폐인되려고 날아왔나? 설정샷을 찍고 나서 게임은 살포시 끕니다.

 

 끄고 나니 배가 고픕니다. 아.... 아까 사왔으면 좋았을텐데, 사온 건 안주 뿐입니다. ㅋㅋㅋㅋㅋㅋ와 진짜 나란인간... 한심.

 

 

 다시 마트에 먹을 걸 사러 나가면서, 건물도 전체적으로 둘러봅니다.

 

 

 

 여긴 세탁실. 세탁은 공짜입니다. 세제도 살 필요가 없어요 ^오^ 지금 찍힌 건 건조기인데, 이 세탁실에 세탁기 여섯, 건조기 여섯이 있습니다. 하루에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만 사용이 가능하구요, 예약도 가능하긴 한데 제 경험 상 갔을 때 세탁을 못 한 적은 없네요.

 

 다만 주의할 점은 오후 10시까지만 가능하기 때문에, 오후 9시 20분 이렇게 어정쩡하게 가서 안 될 때가 있어요. 그럴땐 애벌세탁 빼고, 최대한 짧은 코스로 돌리면 예상 시간이 줄어들어서 사용이 됩니다.

 

 

 

 

 

 

 이곳은 분리수거장, 가건물 같은 곳이 둘 있고, 각 건물 내에 분리수거함이 있습니다. 설명을 읽어보면 어려울 건 없는데, Biowaste(음식물) 버릴 때 냄새가 나는 것이 약간 고역일 뿐...

 

 

 

 

 

 

 이제 다시 알레파 마트로 갑시다.

 

 

 

 

 

 

 

 

 

 

       

 

 무민 캐릭터가 붙은 상품이 굉장히 많습니다. 사실 저는 무민에 대해선 잘 몰랐어요 ^_^;; 핀란드에 관심 갖기 전까진 아예 듣도보도 못한 캐릭터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꽤 유명하고 한국에서도 아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놀라웠음 ㅎㅎ

 

 

 

 

 

 

 

 

 고기 가격 핵극혐......ㅠㅠ

 

 

 

 

 

 

 

 

 

       

 

연어. 갑자기 연어가 먹고싶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왼쪽은 염장 연어, 오른쪽은 그라브 락스. 전 그라브 락스가 뭔지도 모르고 골랐습니다. 비극의 시작 ㅠ

 

 

 

 

 

 

 

 

 

 

 

 

그리고 앞으로 핀란드 인생의 동반자가 될 올리브. 99센트. 검은 올리브는 80센트대에 팝니다.

 

 

 

 

 

 

바야흐로 오늘의 만찬은 그라브락스 연어와 올리브!

 

와...진심...

 

느끼해죽는줄 ㅠㅠㅠ

 

ㅋㅋㅋㅋㅋㅋㅋ 사실 이건 저게 뭔지도 모르고 산 저의 잘못이긴 합니다만...

 

그래서 어제 먹고 남은 빵도 꺼내서, 올리브랑 같이 열심히 쳐묵쳐묵합니다.

 

으으.비려...비.....려...하면서 열심히 먹었는데, 먹는 도중의 사진은 없네요. 어헣... 사실 빵 위에 올리브를 올려서 어떻게든 고급지게 보이려고 한 사진들이 있습니다만, 너무 흔들려서..

 

 

 

 

 

         

 

아래에 놓인게 고기여 빵이여 뭐시기여...

 

 

 

 

굉장히 알 수 없는 사진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으으. 느끼했던 그라브락스 연어를 다 먹어치우기 위해 발휘해야만 했던 눈물겨운 노력이 지금도 느껴지네요...



그리고 배가 불러진 저는 이윽고 잠에 듭니다.










2015년 8월 12일, 수요일




 이 날은 사진이 별로 없어요. 사료가 별로 안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죠. 그러니 약간 상상과 추측을 가미해서 열심히 씁시다.


 


 아파트에서 첫 샤워를 했는데, 욕실 등이 굉장히 깜빡거립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등은 몇 일 내로 고장나고 마는데요. HOAS에 리포트를 넣었지만 20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리를 안 해 주는 비범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한 번 리포트를 넣었고, 다른 플랫메이트가 리포트를 더 넣었는데도... 이제 9월이 되었으니 리포트를 또 넣어볼까 합니다 ^_^





 아무튼 이날 그리 빨리 일어나지 않은 저는, 또 점심 겸 저녁을 사먹고자 체육복을 입고 밖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 혐짤주의
















^오^






 여긴 아파트 건물에서 30m도 채 안 떨어진 곳이에요. 큰 길로 나가는 사이에 나무들이 엄청 많아서, 얼핏 보면 숲처럼 느껴집니다. 캬 크-린한 숲이 바로 눈앞에 있으니 너무 기분이 좋아져서 첫 셀카를 찍었습니다 ^_^







 이번엔 가격의 차이를 느껴보고자 메트로 역 근처에 있는 대형마트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콘툴라 역 가는 길!진짜 사소한 거지만 평범한 인도-가로수-차도 구도인데도 녹지가 엄청 넓은 걸 느낄 수 있어요 ㅋㅋㅋㅋㅋ


 



 아직 추위를 맛보지 못해서 그런지 핀란드 하면 이제 눈보다는 나무가 떠오릅니다.






 콘툴라 역 근처에는 대형마트들이 몰려있습니다. S MARKET, LiDL, K SUPERMARKET 등이 있는데, 가격은 독일계 회사인 LiDL이 제일 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그런 걸 몰랐던 관계로 가장 눈에 먼저 띄었던 K SUPERMARKET으로 들어갔습니다.






Alepa와는 다른, 탁 트인 마트의 전경














역시나 경축스러운 가격의 바나나















경축스러운 가격의 청포도














빵의브레드의 가격의프라이스는 울부짖음의샤우팅을내뱉었다... "79센트"










... 이것은 비쌈









과일주스 1리터에 75센트 ...


요즘(글 쓰는 지금) 기준 귀찮아서 집근처 Alepa에서 1유로 넘는 주스 사먹었는데 이 사진 보니까 갑자기 저의 낭비벽에 개빡치네요 ㅡㅡ


내일부턴 메트로역간다 ㅡ











 프링글스도 알레파보다 더 쌉니다. 물론! 예전에 한국에서 팔았던, 한국보다 더 큰 사이즈에 맛 종류도 많네요.








 담고 싶은 거 다 담아서 집으로 가져왔더니 아래와 같습니다.






캬-


진수성찬ㅠ_ㅠ





금수저가 된 이느낌...오오...




감동해서 쳐묵쳐묵했는지 제가 먹은 과정은 찍지도 못했네요. 아마 주스 하나 뜯고, 우유랑 올리브랑 빵, 사이다, 바나나 등등 먹었을 듯... 합니다.



그리고 이걸 다 먹은 저는 침대에 누워서 까똑 까똑 하다가 잠에 빠졌겠죠.








 이렇게 저는 혼자서 드넓은 기숙사 아파트에서 이틀을 보내었습니다.


 꼐속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