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La Casa de los Espiritus

『영혼의 집』
이사벨 아옌데


 대학에 와서 첫 학기를 시작할 때, 아마 가장 설렜던 때가 시간표를 짜던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때 '핵심교양' 과목 중 고르고 골라서 선택한 과목이 김창민 교수님의 '라틴아메리카 문학과 사회' 과목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익하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던… 수업이었습니다. 일단 무엇보다도 무지하게 졸렸습니다. 교수님의 목소리도 목소리거니와, 수업 시간대가 워낙에 자기 좋은 시간대라서, 앉으면 거의 꿈나라로 직행하곤 했습니다. 거기다가 수강한 여섯 과목 중에 가장 많은 무지막지한 과제량을 자랑습니다. 출석, 서평 3회, 온라인 토론 3회, 영화평 4회, 쪽지시험 2회, 조별 주제 발표 1회, 거기에 기말고사까지. 물론 태도 점수도 조교님이 체크하시는 것 같았구요. 대학에서 사용 가능한 모든 평가 방법을 다 동원한 수업이 아니였나 싶습니다.
 그래서 저희 조가 제일 첫 조로 조별 발표를 마치고 난 후에는 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4월을 지나면서 어느 새 화-목은 하루 종일 자는 날이 되어버렸고, 라틴아메리카 문학과 사회는 하루의 수면량을 책임지는, 이 잠의 타임라인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었습니다. 초반에 교수님의 강의 이후는 학생들의 조별 발표로 수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딱히 필기하거나 들을 것도 없었고, 그러므로 자고 또 잤습니다. 미친듯이. 교수님은 지식도 풍부하셨고 유머 감각도 있으셨지만 이미 기울어진 대세는…. 그렇게 한학기 내내 자다가 수업을 끝마치게 되었습니다. 학점은 만족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한 학기 내내 수면을 취했음을 생각해 봤을 때 충분히 잘 떴습니다. 이정도로만 보면, 그냥 무난한 교양 수업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수업을 통해 알게 된 명작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갓 대학에 입학한 학부생에게 다양한 교양은 필수적 요소이고, 어떻게 보면 이 수업은 미친듯이 졸리는 것을 제외하면 라틴아메리카의 문학 작품 다섯을 읽게 함으로써 그 소임을 충실히 이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 이름만 알았지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는 마술적 사실주의에의 거대한 매력을 느꼈고, 임철우『백년 여관』에서는 마술적 사실주의 내지 주술적 요소들이 역사적인 배경과 결합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수업의 마지막 서평 과제였던 이사벨 아옌데『영혼의 집』에서는 역사성과 마술적 사실성이 결합하여 역사의 성찰을 이루고 화해의 미래를 구축해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서평은 머리를 짜내지 않고 쓸 수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부족한 비전공자 학부생의 눈으로 『영혼의 집』을 살펴 보겠습니다.
 

이사벨 아옌데, 1990년

 이 소설에 대해 이해하려면 먼저 이사벨 아옌데가 누군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사벨 아옌데는 1942년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태어났고, 외교관인 의붓아버지를 따라서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다가 17세에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언론계에 종사합니다. 기자, 편집자, 희곡 작가 등으로 활동하며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맡다가, 오촌[각주:1]인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쿠데타에 의해 실각, 사망함에 따라 위험 인물 명단에 올라가게 되고 1975년 베네수엘라로 망명, 도피하게 됩니다.
 아옌데는 도피처인 베네수엘라에서 작가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합니다. 1981년 외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외할아버지께 편지를 쓰는데, 이 편지를 토대로 탄생한 작품이 바로 『영혼의 집』입니다. 이 작품은 극찬을 받고, 아옌데는 세계적 유명 작가가 됩니다. 이후에도 『에바 루나』,『파울라』 등의 많은 소설들을 발표하면서 문단에서의 입지를 굳혔고, 최근에는 『영혼의 집』에 이은 3부작인 『운명의 딸』『세피아빛 초상』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아옌데는 쿠데타로 인해 쫓긴 사람입니다. 즉 진보적 지식인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성이 너무나도 잘 드러납니다. 그 역사성을 마술적 사실주의로 녹여내고 있는 작품이 『영혼의 집』입니다.


1. 소설의 줄거리와 역사적 배경

 이 책의 제목인 '영혼의 집'은 이 책의 주인공인 트루에바 가문이 살아가는 집을 지칭합니다. 에스테반의 부인 클라라가 불러낸 영혼으로 가득찬, 그리고 종국에는 클라라가 영혼이 되어 떠도는 '모퉁이 큰 집'입니다. 이 집은 에스테반이 클라라와 결혼할 때 지어서 집안의 번영과 함께 하고, 집안의 몰락과 함께 쇠퇴합니다. 이 집은 그 자체로 트루에바 가문을 상징합니다.
 이 영혼의 집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트루에바 가문은 라틴아메리카 역사의 질곡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소설의 처음 부분은 막연한 한때의 라틴아메리카를 다루며 특정한 시간적 상황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몰락한 귀족이었던 에스테반은 과거의 영지를 가꾸어 지주가 되지만, 투표소를 감시하기까지 하면서 소작인들의 권리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 보수적이고 봉건적인 특권층의 모습을 보입니다. 역사는 점점 진행됩니다. 에스테반의 첫아들인 하이메는 새로운 사상에 심취하지만 실천은 꺼리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블랑카와 알바는 낮은 계층의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고, 클라라는 이를 묵인합니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시대정신과 연관되어 있고 가족 내에서도 서로 적대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아마 이 시기에 칠레의 집안들은 대체로 이러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살바도르 아옌데, 1973년

 그러다가 점점 역사는 구체화됩니다. 외국으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한번도 없었던 나라, 지배층으로부터 한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던 피지배층에게 적극적으로 유입되는 혁명의 사상들은 너무나 매력적이었습니다. 기존의 사상과 미덕들을 수호하기 위한 보수층과 새로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혁신층의 대립은 선거에서 사회당의 승리로 이어졌고, 결국에는 보수 세력의 반발로 인한 쿠데타로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됩니다. 
 이 후반부의 줄거리는 살바도르 아옌데와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야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칠레에서 있었던 1970년의 선거에서 살바도르 아옌데는 대통령이 되고, 살바도르 아옌데의 정당인 인민 연합은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정당이 됩니다. 집권한 그는 '사회주의를 향한 칠레의 길(La via chilena al socialismo)'을 주창하며, 대규모 산업을 국유화하고 정부의 의료와 교육의 관리, 어린이에 대한 우유 무상 배급 등을 시행합니다. 그러나 기존 보수층과 미국의 방해로 칠레의 경제는 난항을 겪습니다. 특히 미국의 구리 가격 인하가 칠레 경제에 치명타를 가합니다. 이 와중에도 인민 연합이 지방 선거에서 선전하자 보수층은 1973년 쿠데타를 통해 아옌데를 몰아냅니다. 아옌데는 대통령 궁에서 버티다가 최후의 연설 이후 자살합니다. 이사벨 아옌데는 혁명과 쿠데타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면서 독자들에게 역사에 대한 심판을 요구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 비극적 역사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또한 책이 쓰인 시점이 군사 정권의 종결 전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결말은 희망적입니다. 이것은 아이러니인데, 이러한 극한의 절망적 상황에서 가족들은 마침내 화해하게 됩니다. 보수 세력의 무장 봉기를 계속해서 주장해왔던 에스테반도, 손녀딸 알바가 특수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가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평화와 관용 없이는 국가의 미래나 가족의 행복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결국 에스테반은 가난한 농민 혁명가 페드로 테르세로를 사랑한 딸 블랑카와 과격파 혁명가인 미겔을 사랑한 손녀딸 알바를 용서합니다. 이는 보수파와 혁신파의 화합을 상징하며, 화해의 역사를 추구하는 이사벨 아옌데의 뜻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화해의 결단에는 또한 깨달음이 깔려 있습니다. 알바는 에스테반 가르시아 대령을 용서하기로 결정하면서, 에스테반 트루에바가 에스테반 가르시아의 할머니 판차 가르시아를 넘어뜨렸을 때 업의 고리가 연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이 복수의 마음을 품으면, 또 다른 피의 역사가 수십년 동안 지속될지도 모르기에 그녀는 복수를 포기합니다. 
나는 이제 증오심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도 없다. 내가 가르시아 대령과 그와 같은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서 증오심도 차츰 수그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 내가 복수를 하게 되면 마찬가지로 처절한 복수의 연장이 되기 때문에, 이제는 복수받아 마땅한 사람들 모두에게 복수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내 임무는 살아남는 것이고, 내 사명은 두고두고 증오를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원고를 채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각주:2]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옌데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작품 초반에서 후반으로 갈수록 종교의 가치가 긍정적으로 전환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폭언을 퍼붓는, 광기의 온상이라 할 수 있는 레스트레포 신부가 작품 초기 종교의 부정적 이미지를 대표한다면, 중기에는 페룰라 고모와 상담하며 비밀을 지켜주고, 그녀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안토니오 신부가 보다 순화된 종교의 이미지를 대변합니다. 그리고 군부의 독재기에 가서는 빈민들을 구제하고 자선 활동을 펼치는 종교의 이미지가 부각되며, 에스테반에 의해 '빨갱이'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이는 당연히 실제 역사와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제국주의 시대와 독립 초기에 종교는 지배 계층의 입맛에 맞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계도 점점 새 시대를 맞아 해방되기 시작했고,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주교는 진정한 해방신학 운동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독재 시대를 맞아서는 종교도 구제와 자선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렇게 변화한 종교의 이미지를 이사벨 아옌데가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대통령궁을 포위한 쿠데타군


2. 소설에 나타난 남성상과 여성상

 이사벨 아옌데는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트루에바 가문에서 남성은 대체로 부정적으로, 여성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트루에바 집안의 대표적인 남성 캐릭터인 에스테반 트루에바만을 봐도 이 점은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에스테반은 애초에 로사 델 바예를 사랑한 것도 순수한 마음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었으며, 이후 트레스 마리아스 농장을 경영하면서 소작인들을 착취하고 딸들을 자기 마음대로 강간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클라라와의 결혼 이후에는 정말로 가부장의 극치를 보여 주는데, 딸과 연애한 페드로 테르세로를 도끼로 내려쳐 손가락들을 잘라버린 것이나, 화를 이기지 못하고 클라라의 얼굴을 때려 이를 뽑아 버리는 등의 행동에서는 폭력성까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야말로 라틴아메리카의 전형적인 남성상입니다. 에스테반의 아들 니콜라스 역시 부정적인 남성상으로, 바람기만 충만하던 그는 인도에 갔다온 뒤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되고, 아만다가 임신한 상황에서는 책임을 지지 못하고 쩔쩔 매기만 하는 한심한 인간상을 보여 줍니다.

 반면에 니베아 델 바예, 클라라, 블랑카, 알바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특징은 진취적이고 자기 주도적이라는 것입니다. 클라라의 어머니 니베아 델 바예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 투신했고, 클라라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녀 심령술 탐구에 몰두합니다. 비록 집안일엔 무관심하지만 유모와 페룰라 고모가 사라진 상황에서는 집안일을 곧잘 해내며, 줄곧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블랑카는 태어날 당시에는 털이 달린 기묘한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페드로 테르세로와 사귀며 주어진 길에서 벗어나고, 알바는 처음에는 미겔과의 사랑에서 학생운동에 가담한 것이지만 공포 정치 시대에는 스스로 목숨을 무릅쓰고 해바라기를 그려넣은 차를 통해 미겔의 사람들을 구조해 줍니다. 이런 일은 독자적 결단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트루에바 가문 외에도, 50페소를 바탕으로 싸구려 사창가를 고급 호텔로 변모시켜 마지막에 에스테반 트루에바에게 도움을 주는 트란시토 소토 역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여인상을 보여 줍니다.
 물론 이 소설이 단지 부정적 남성 대 긍정적 여성의 이분법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이메의 경우에는 비록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면도 있지만,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정의를 위해 투신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의사로서 많은 돈을 벌려고 하지 않고 빈민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주고, 사회당의 의견에 동조하는 그는 폭력을 부정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거짓 증언을 거부하여 군부의 폭력에 죽음으로 맞선 그는 트루에바 가문에서의 긍정적 남성상이라 할 만 합니다.
 트루에바 가문을 벗어나면 긍정적 남성상을 더 찾을 수 있기는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긍정적 남성상은 트루에바 가문의 긍정적 여성상인 블랑카, 알바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블랑카의 연인인 페드로 테르세로와 알바의 연인인 미겔은 여러모로 유사한 인물로, 둘 다 열성적 혁명가이며 에스테반에게 부정받고, 공포 정치기에는 탄압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딱히 그 캐릭터 자체로 독자적인 남성이라기 보다는 블랑카와 알바의 독자성을 만들어내기 위한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시대적 배경 때문에 독자적 여성을 창조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남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일부 예외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라틴아메리카의 가부장적인 남성상과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신여성상을 대비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두 이미지가 충돌하면서 피해를 보는 쪽은 여성이고, 클라라는 가장 큰 피해를 입습니다. 미래를 예지하고 초능력을 사용하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가부장적 권위 앞에서 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합니다. 에스테반은 비록 클라라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도 했지만, 가부장제 내에서 클라라를 억압하는 기제로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이 단순히 남성들을 공격하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책의 서술자의 시점은 계속해서 바뀝니다. 에스테반의 시점과 3인칭 시점이 교체되다가 마지막엔 알바의 시점이 들어가는데, 에스테반의 시점이 들어간 장면들에서는 라틴아메리카의 가부장적인 남성이 가진 생각, 그리고 그가 겪는 나름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가 계속해서 발휘하는 폭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클라라와 블랑카, 알바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점은 인상적입니다. 즉 가부장제 하에서는 남성도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소설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잘 쓰인 페미니즘 소설입니다.


3.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과『백년 동안의 고독』과의 비교

 『영혼의 집』에서는 또한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인과 법칙에 맞지 않는 문학적 서사 방식입니다. 이는 작품 내에서는 적용되는 일반적 규칙을 갖고 있는 판타지 소설과는 다르며, 스토리는 예측 불허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또한 마술적 사실주의의 특징적 경향은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그러한 이상한 일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백년 동안의 고독』에서는 호세 아르까디오의 죽은 피가 우르슬라에게까지 흘러가서 죽음을 알리고, 작중 인물들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이 소설에서 마술적 사실주의는 작품에 드문드문 쓰이면서 서술을 더 강렬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일부 등장인물은 마술적인 인물로 묘사되는데, 특히 클라라가 대표적입니다. 물건들을 움직이거나 미래의 재난을 미리 예언하고, 나중에는 영혼들과 대화하며 죽고 나서도 '영혼의 집'을 배회합니다. 클라라의 개 바라바스도 초반에 책의 마술적 서격을 특징짓는 강렬한 마술적 사실주의를 보여줍니다.

 마술적 사실주의를 논하려면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 마술적 사실주의 작품인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과의 비교가 필요할 것입니다. 사실 『백년 동안의 고독』도 수업 중 서평 과제에 포함되어 있었고, 교수님께서는 한국 작가 임철우의 『백년 여관』과 비교하여 서술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같은 문화권에서 쓰인 작품이기에 『영혼의 집』과 비교할 것이 더 많은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온라인 토론을 발표할 때에도 『영혼의 집』 발표에서는 시키지 않았지만 『백년 동안의 고독』과의 비교가 각 조에 모두 들어가 있었습니다.
 『백년 동안의 고독』 역시 『영혼의 집』처럼 한 가문의 역사를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나타낸 소설입니다. 그러나 마술적 사실주의를 강렬하게 사용함에 따라 역사적인 요소들은 많이 추상화되었고 접근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문학성은 뛰어났지만 보통 사람이 보기에 난해하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에 비해 『영혼의 집』은 역사적 시간 구성을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집권과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 등은 이름만 지워졌을 뿐이지 역사적 사건의 충실한 재현입니다. 아옌데는 로사의 미모, 에스테르 부인의 비참함, 심령술의 신비함 등 필요한 부분을 강조하는 데에만 마술적 사실주의를 사용하여 이러한 부분들이 강렬하게 느껴지게 만들면서도 실제 역사 사건들이 등장하는 후반부에는 기록주의적 서술에 치중하여 비장미를 느끼게 했습니다. 마술적 사실주의를 사용했으나 이를 적절히 자제함으로써 책 전체의 혼잡성을 줄인 것입니다. 따라서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느껴지는 엉뚱한 스토리 전개와 해학성은 덜하지만, 조금 더 일반적인, 나름의 세계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백년 동안의 고독』의 연속된 순환 이후 종말하는 묵시록적 세계관과 달리 『영혼의 집』은 역사적인 선적 세계관을 따릅니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부엔디아 가문과 마꼰도는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없지만, 『영혼의 집』의 결말은 열린 미래를 지향합니다. 또한 『백년 동안의 고독』이 남성 기준에서의 가족사를 다루고 있다면, 『영혼의 집』은 니베아 - 클라라 - 블랑카 - 알바로 이어지는 여성 기준에서의 가족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파블로 네루다

 『영혼의 집』은 칠레의 사람들과 사회, 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뛰어난 소설입니다.리고 단지 그 뿐만이 아니라 충분히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칠레의 슬픈 역사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알게 하고 감동을 느끼고, 분노를 느끼는 그 감정을 공감하게 하는 데에도 이 책의 의의는 충분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벨 아옌데의 칠레에 대한 사랑을 느끼는 데에도요.
 마지막으로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이라면 파블로 네루다에 대한 언급입니다.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의 천재적인 시인으로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1971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또한 사회주의 정치가였습니다. 1943년 칠레 북부에서 사회당의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한 때는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외국으로 도주하기도 했으나, 살바도르 아옌데 집권 후에는 칠레에서 낭송회를 가지기도 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시인입니다. 그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 당시에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이 책은 도입부터 파블로 네루다의 말과 함께 시작하며, 본문 군데군데에 ‘시인’이라는 명칭으로 파블로 네루다에 대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책의 종반에서는 파블로 네루다의 장례식 장면이 나오고, 시민들이 장례식을 계기로 군부에 항거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에, 그리고 아옌데에게 큰 의미를 지닙니다.

 『영혼의 집』이 쓰여진 지는 거의 30년이 되어갑니다. 최악의 공포 정치를 펼쳤던 피노체트 정권이 무너진 지도 20년이 지났습니다. 그간 남아메리카에는 속속 좌파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칠레는 바첼레트 여사의 좌파 연합 정권이 엄청난 지지율을 기록하며 퇴임했지만, 곧 우파 정권이 들어서는 등 민주적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은 역사에서 충분히 배웠을까요? 과연 그들은 화해의 미래를 쓸 수 있을까요?

결국, 인간은 얼마나 사는 걸까?
천 년? 단 하루?
일주일? 수 세기?
인간은 얼마나 오랫동안 죽는 걸까?
'영원히'라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파블로 네루다[각주:3]

영혼의 집 1 - 10점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민음사


영혼의 집 2 - 10점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민음사

  1. 흔히 이사벨과 살바도르 아옌데는 삼촌 관계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실 살바도르 아옌데는 이사벨 아옌데의 오촌 당숙부가 됩니다. [본문으로]
  2. 이사벨 아옌데, 《영혼의 집》1, 민음사, 2003, 327~328면. [본문으로]
  3. Ibid., 9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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