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2월 14일에, 2월 14일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니 발렌타인 데이만 즐길 것이 아니라 역사에도 신경을 써야 된다는 식의 글들을 많이 봤던 것 같다. 솔직히 웃기는 일이라 생각했다. 특히 발렌타인 데이 분위기에 못마땅해하는 느낌이 감지되어서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럼 우린 안중근 의사의 탄신일, 이토 히로부미 저격일, 사형선고일, 사형집행일, 이토 히로부미를 쏘기로 마음먹은 날... 등등에 다 유념하고, 그럼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등등의 날짜들도 다 유념하고 그 때마다 순국선열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런 날짜들을 외우는 게 정말 '역사'를 아는 것인가.

순국선열께는 평소에 감사하는 마음을 품으면 되고, 발렌타인 데이에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와 초콜릿 잘 까 먹으면 된다.


2. 근데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과 발렌타인 데이에 묻혀버린 2월 14일이 하나 더 있어서 그걸 조금이라도 더 알았으면 좋겠다 싶어서 이렇게 뻘글을 쓰게 되었다. 1990년 2월 14일은 바로 내가 올린 이 사진이 촬영된 날이다. 태양광 때문에 새 개의 밝은 부분이 보이고, 가장 오른쪽의 중간 쯤에 점 하나가 찍혀 있다.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면서, 해왕성 궤도 밖으로 나아가면서 찍은 사진. 저기 보이는 아주 작은 점이, 바로 우리가 사는 지구다.


3. 내가 이 사진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칼 세이건 때문이었다. 미국의 물리학자, 천문학자이자 대중저술가인 칼 세이건은 1996년에 죽었는데, 1994년에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는 책을 출간했고(개인적으로는 '희미한 푸른 점'이 더 알맞은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이 사진에 대한 장으로 시작한다. 

 칼 세이건은 이 책 말고도 정말 많은 책들을 썼다. 어릴 때부터 칼 세이건의 책들을 읽으며 무한한 존경을 느껴왔는데, 그 존경의 이유는 차가운 이성과 더불어 항상 기저에 깔려 있는 낙관주의였다. 


4. 생각건대 서방 사람들에게 아마 90년대 중반은 그러한 낙관주의가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였을 것이다. 소련의 붕괴와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라는 '역사의 종말' 앞에서, 한국인들은 IMF 전까지, 미국인들은 9.11 테러 전까지 역사가 올바른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다는 기분을 만끽하지 않았을까.

 칼 세이건의 낙관주의는 이런 일시적인 낙관주의와는 다르고, 냉전기에 수많은 국제적 위기를 겪으면서도 그 저술들의 기저에 항상 깔려 있었지만, 칼 세이건이 이 사진에 대해 쓴 글을 읽으며 내가 항상 느끼는 줄어들지 않는 감동의 강도는, 이 글에 반영된 것은 칼 세이건 개인의 낙관과 임종 직전의 감정에 더해, 그 낙관의 시대까지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5. 그래서 칼 세이건은, 이 사진을 보고서, 이런 글을 썼다.


"Consider again that dot. That's here. That's home. That's us. On it everyone you love, everyone you know, everyone you ever heard of, every human being who ever was, lived out their lives. The aggregate of our joy and suffering, thousands of confident religions, ideologies, and economic doctrines, every hunter and forager, every hero and coward, every creator and destroyer of civilization, every king and peasant, every young couple in love, every mother and father, hopeful child, inventor and explorer, every teacher of morals, every corrupt politician, every "superstar", every "supreme leader", every saint and sinner in the history of our species lived there — on a mote of dust suspended in a sunbeam.

저 점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저 점이 여기이고, 저 점이 우리 고향이며, 저 점이 우리 자신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모두가, 당신이 아는 모두가, 당신이 들어본 모두가,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인간이, 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아나갔습니다. 우리 기쁨과 슬픔의 총합이, 수천 개의 자신만만한 종교들이, 이데올로기들이, 경제 교리들이, 모든 사냥꾼과 채집자가, 모든 영웅과 겁쟁이가, 문명의 모든 창조자와 파괴자가, 모든 왕과 농부가, 사랑에 빠진 모든 젊은 연인이,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가, 촉망받는 아이가, 발명가와 탐험가가, 윤리를 가르친 모든 스승이, 모든 부패한 정치가가, 모든 "슈퍼스타"가, 모든 "위대한 영도자"가, 우리 종(種)의 역사의 모든 성인과 죄인이 바로 저 곳에 - 태양빛 한 줄기에 매달린 흙 티끌 위에 살았습니다.

 

The Earth is a very small stage in a vast cosmic arena. Think of the rivers of blood spilled by all those generals and emperors so that, in glory and triumph, they could become the momentary masters of a fraction of a dot. Think of the endless cruelties visited by the inhabitants of one corner of this pixel on the scarcely distinguishable inhabitants of some other corner, how frequent their misunderstandings, how eager they are to kill one another, how fervent their hatreds.

우주라는 광막한 경기장에서 지구는 아주 작은 무대에 불과합니다. 저 점의 극히 일부를 찰나동안 지배하는 주인이 되기 위해서, 영광과 승리 속에서, 장군들과 황제들이 흘리게 한 피의 강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화소(pixel)의 한 구석의 거주자들이 거의 분간할 수 없는 다른 구석의 거주자들에게 자행한 끝없는 잔혹함을, 그들의 오해가 얼마나 잦았으며, 서로를 죽이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이 얼마나 강했으며,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열렬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Our posturings, our imagined self-importance, the delusion that we have some privileged position in the Universe, are challenged by this point of pale light. Our planet is a lonely speck in the great enveloping cosmic dark. In our obscurity, in all this vastness, there is no hint that help will come from elsewhere to save us from ourselves.

우리의 가식은, 우리의 상상된 자기 중요성은, 우리가 우주에서 어떤 특권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망상은, 이 희미한 빛 한 줄기에 의해 도전받습니다. 우리 행성은 우리를 감싸는 거대한 우주적 어둠 속의 외로운 얼룩입니다. 우리의 보잘것없음과, 이 모든 광막함 속에서,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도움이 다른 곳에서 올 기미란 없습니다.

 

The Earth is the only world known so far to harbor life. There is nowhere else, at least in the near future, to which our species could migrate. Visit, yes. Settle, not yet. Like it or not, for the moment the Earth is where we make our stand.

지구는 지금까지 생명을 품고 있는 유일한 세계입니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는, 우리 종(種)이 이주할 수 있는 다른 장소란 없습니다. 방문은 가능하겠지만, 정착은 아직 안 됩니다. 좋든 싫든, 지금은 지구만이 우리가 버틸 수 있는 장소입니다. 

 

It has been said that astronomy is a humbling and character-building experience. There is perhaps no better demonstration of the folly of human conceits than this distant image of our tiny world. To me, it underscores our responsibility to deal more kindly with one another, and to preserve and cherish the pale blue dot, the only home we've ever known. 

천문학은 사람을 겸손케 하고, 인격을 형성하는 경험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인류가 느끼는 자만심의 어리석음을 우리가 사는 자그마한 세계를 멀리서 본 이 사진보다 더 잘 드러내는 것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저에게 이는, 서로에게 더 친절하게 대해야 하는 책임과,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유일한 보금자리인 희미한 푸른 점을 보존하고 아껴야 하는 책임을 강조합니다."

 

6. 내가 만 25세고 이 사진이 내 출생보다 1년 반 전에 찍혔으니 이 사진은 벌써 만 27세가 되어버렸다. 27년 전의 세계와 지금은 너무 달라 보인다. 전세계의 보편적 개방과 발전을 이끌 것 같았던 기존 체제는 고립주의의 물결에 위태로워지고 있고, 낙관은 사라져버린 것 같다. 칼 세이건이 얘기했던, "이 점의 극히 일부를 찰나동안 지배하는 주인"이 되고자 한 자들이 흘리게 한 피의 강이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 아프가니스탄, 우크라이나, 말리, 나이지리아 등 저 점의 여러 군데에서 쉴 새 없이 흐르고 있다. 티끌같은 희미한 푸른 점 위에서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위대함을 "증명"하고 강제하고자 힘쓰고 있다. 칼 세이건이 살아있었다면 변함없는 낙관주의로 무언가 일을 했겠지만, 아마 90년대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7.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적어도 나는 광막한 우주 속에 놓인 티끌같은 인간으로서의 겸손함을 느낀다. 그리고 칼 세이건의 글을 읽을 때마다 위대한 낙관주의자가 남긴 잔향을,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느낀다. 그로써 내 구체적 계획과 행동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때로는 그저 그런 느낌들만으로도 충만하다.






1.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소설)

대구에 내려갔을 때 동생이 사 놓아서 읽게 된 소설. 작가는 그린피스에서 활동할 만큼 열성적인 환경주의자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내용도 자연과 '양키' 또는 '읍장'으로 대표되는 야만적인 서구문명의 대결 같은 느낌, 그러니까 환경주의의 팜플렛 같은 느낌이었다. 구성과 전개는 좋고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는 비장미와 숭고미마저 감돌지만, 역시 자연 vs 인간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표현되는, 클리셰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등장인물들을 단순화시켜버린 환경주의적 이념 과잉이 느껴져서 읽고 나서는 글쎄... 별 세 개 정도 주고 싶다.


2. 김영하, 『보다』(에세이)

관찰력 + 글빨의 간지 시너지를 보여주는 김영하의 에세이집. 김영하의 비문학은 처음 읽는데, 소설의 내용들이 그렇듯이 글들이 날카로운 것 같다.


3. 다이허우잉, 『사람아 아, 사람아!』(소설)

소설을 읽으며 즐거움을 느낄 때 중 하나는 소설을 통해 한 때 존재했던 '다른 세상'에 대해 깨달을 때일 것이다. 옛 시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비문학으로 충분하지만, 그 세계에 살아 보기 위해서는 문학이 필요하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나오던 시절 서구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 총을 들고 외국의 전장으로 달려갔다. 마찬가지로 다이허우잉의 이 소설의 배경, 문화대혁명과 그 이후, 개방 전의 중국 사회 역시 지금과 거의 다른 세계이다. 대자보와 문예 비평, 휴머니즘과 마르크스주의를 놓고 싸우는 이 소설의 배경은 중국보다 오히려 처음 대학에 입학하던 시절의 캠퍼스를 떠올리게 했다. 물론 그 때만 해도 이미 운동권의 세력은 매우 약해졌지만, 자보는 어딘가에 계속 붙었고 자보를 읽는 사람도, 자보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시계를 2010년에서 20년 정도 더 뒤로 돌리면, 다이허우잉의 소설에 나오는 사회와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될 것 같다.

다만 그와 별개로 소설을 읽기는 꽤 즐겁지는 않았는데, 일단 내 독해력이 떨어져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문장이 매끄럽게 읽히지 않았고, 화자가 너무 자주 바뀌어서 혼란스러웠으며, 무엇보다 여러 개의 주 주제 중 '휴머니즘'과 '마르크스주의'가 서로 반대되는 것인지 조화하는 것인지에 대해 등장인물들이 다투는 것이, 이 소설의 배경이 정말 '옛날'이라는, 그러니까 현재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구나 하는 느낌을 주어서. 그렇게 치열하게 논쟁하고 투쟁하던 사람들, 교조주의자, 개량주의자, 수정주의자, 정통주의자들은 지금 중국 어디에 있을까.


4. 김애란 外 11인, 『눈먼 자들의 국가』(에세이)

세월호 사건에 관한 문인/학자들의 글을 모은 책. 의경은 정치적 중립 의무가 있기에 뭐라 의견을 쓰긴 그렇고, 다만 읽고 나니 박민규의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그런데 박민규보다 편혜영을 먼저 읽었네.


5. 우치타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철학 입문서)

철학에 대해 너무나 무지해서, 얇고 쉬울 것 같아 진중문고에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처음부터 저자도 구조주의에 대해 잘 모른다고 고백하며 들어가서 도대체 뭐하자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많은 것을 다루기보다는 핵심 개념 위주로 간략하게 다루는데, 투자한 시간에 비해서는 재밌고 괜찮은 책이 아니었나 싶다.


6. 칼 세이건, 『코스모스』 (과학)

내가 항상 닮고 싶었던, 항상 존경할 수밖에 없는 칼 세이건이지만, 코스모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처음. 무엇보다 나의 얕고 넓으며 여러 분야에 균질하지 않은 지식 때문에 어떤 부분은 아예 모르고 어떤 부분은 들어봤고, 이런 것들 때문에 코스모스를 읽기가 달갑지 않았지만, 말년 버프도 있고 해서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읽었다. 처음에 나오는 세네카의 인용구는 볼 때마다 항상 가슴이 뛴다. 항상 세계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품고 우리가 사는 세계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과학에 대해 항상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칼 세이건이 오래 살지 못하고 96년에 죽은 것이 너무나도 아쉽다. 지금처럼 다시 민족주의와 종교적 광신주의같은 극단적 이념갈등들이 분출하는 시대에 칼 세이건이 살아 있다면 그래도 합리적이면서 옳은 지식인이 어떤 사람인 지 모두가 알 수 있을 텐데.


7. 편혜영, 『재와 빨강』(소설)

읽는 동안 정유정의 『28』을 읽던 생각이 났다. 전염병을 다룬 소설이면, 그래도 문학이라면, 적어도 이랬어야지 하는 뒤늦은 불평. 물론 고종석이 말한 대로 그냥 문학이 하나의 기예일 뿐이라면, 정말 그러할 뿐이라면 서정주의 친일과 친군부 행보도, 수많은 문학인들의 추한 말로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인간의 본능인지 사회적 통념인지 뭐시긴지, 문학은 다른 예술 장르보다 문학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고상'해야 하고, 한 차원 높은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니까. 28을 읽는 동안에는 흔한 오락영화를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 오히려 시청각적 자극이 없으므로 더 따분한 느낌이 들었다면, 처음 읽은 편혜영의 이 소설은 단순한 질병-오락영화적 소설을 뛰어넘어, 전염병의 발생(outbreak)을 통해 인간의 조건과 카프카적 존재의 불안을 이야기한다. 스토리가 개운하게 끝나진 않지만, 숨 쉴 새 없이 빠르고 재미있게 진행되는 뛰어난 오락 소설이 아니라면, 소설이 끝나고 가슴 속에 응어리가 좀 남는 게 소설의 원래 목적에 부합하지 않을까.


8. 편혜영, 『아오이가든』(소설집)

7번 소설을 읽고 바로 집어든 편혜영의 소설집. 7번에서 불쾌하고 불결한 소재들만 다뤘던 것과 달리 이전에 쓴 8번 책에서는 시체, 구더기, 괴물, 이런 것들을 계속 다룬다. 역시 제일 좋았던 건 표제작 '아오이가든'. 뭔가 코스믹 호러 같기도 하고. 정말 우수에 차 보이는, 그래서 그런 쓸쓸하고 섬뜩한 소설만 쓰는 한강과 달리, 얼굴만 보면 굉장히 밝게 웃는 평범한 새댁 아줌마처럼 생겼는데 어떻게 이런 것들만 쓰는지 참으로 ㅎㄷㄷ하다는 나의 궁금증을 반영하듯이, 이 책에는 소설가 사진을 존나 어둡고 똥씹은 표정 짓고 있는 사진으로 해 놓은 게 함정.

12월 들어 2권을 더 읽어서 입대 이후 총 141권을 읽었다. 작년 이맘때의 생각보다는 적게 읽은 거지만 이 정도면 독서 쪽에서는 나쁘진 않았다 싶다. 공부나 운동을 망해서 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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